정부가 벤처투자 활성화를 위한 특단의 대책으로 내놓은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CVC)’이 대기업에 과도한 특혜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SK나 LG 같은 지주회사들이 벤처캐피털 주식을 보유할 수 있게 돼 성역처럼 지켜온 ‘금산분리(일반 기업이 금융사를 보유해 금고처럼 쓰지 못하도록 분리해두는 것)’ 원칙이 흔들릴 수 있고 재벌기업의 편법 승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7일 정부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지난 1일 발표한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 “벤처지주회사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일반 지주회사가 CVC를 제한적으로 보유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어 3일에는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일반 지주사의 CVC 보유를 허용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여당 측도 적극 호응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CVC는 대기업이 출자하는 벤처캐피털(VC)을 뜻한다. 일반 VC는 스타트업을 투자 대상으로 보지만, CVC는 모기업의 전략적 방향에 맞는 회사를 선별해 직접 투자를 할 수 있고, 나중에는 투자 대상 기업과의 인수합병(M&A) 등의 방식으로 사업 확장에 나설 수 있다. 자본과 대기업의 인프라를 활용해 더욱 적극적인 기업 육성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해외에선 구글이나 제너럴일렉트릭(GE) 등이 CVC를 활용해 투자를 하고 있지만, 국내에선 성공 사례를 찾기 힘들다. 지주사 체제의 지배구조에서 일반 지주사가 금융 계열사를 보유할 수 없도록 하는 금산분리 규제 때문이다. 지주사 체제가 아닌 삼성(삼성벤처투자)이나 한화(한화인베스트먼트) 등은 CVC를 보유하고 있지만 SK나 LG등은 규제가 없는 해외에서만 CVC를 운영한다. 롯데는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CVC인 롯데엑셀러레이터를 지주사 체제 밖에 있는 호텔롯데 계열로 처분하기도 했다.
당초 정부는 벤처지주회사에 한해 자회사 지분 보유 요건을 완화하고 비계열사 주식 취득 제한을 폐지하는 수준의 규제 완화를 계획했다. 하지만 일반 지주사의 CVC 보유를 위한 금산분리 완화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20대 국회가 종료돼 자동 폐기됐다.
그러던 정부가 이번 발표에선 기업들이 원했던 CVC를 검토하겠다는 전향적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자금력과 기업 경영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대기업이 CVC를 통해 벤처 투자에 나서면 시장성이 있는 벤처기업의 성장이 가속화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대기업이 CVC를 활용해 기존 벤처기업 대상 M&A에 나서면 기존 벤처캐피털도 투자 기업을 팔아 자금을 회수하고 다시 다른 기업에 투자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기업 성장과 이를 통한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벤처기업 성장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공정거래위원회마저도 최근 들어 한발 물러서는 기류가 감지된다.
하지만 일반 지주회사에 CVC를 허용하는 것은 자칫 산업자본에 금융의 영역을 내 주는 단초가 된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기업이 금융업을 지렛대 삼아 사세를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 등 경제력 집중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전면 시행 대신 ‘검토’로 운을 뗀 것도 이런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CVC가 재벌의 편법 승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기재부가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 비상장 벤처기업에 차등의결권 주식 발행을 허용하는 방안도 반영했는데 CVC와 더해져 재벌체제를 공고화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재벌 3세나 4세가 벤처기업을 만들면 CVC를 통해 모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받으면서도 경영권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정부의 CVC 허용 검토 발표 다음날인 지난 2일 논평을 내고 “CVC는 투자자들의 자금을 모집할 수 있는 엄연한 금융업으로, 경제활력과 혁신을 핑계로 금산분리 원칙을 허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종=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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