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의 화해]집 사고 집값도 알려주지 않는 남편… 저를 못 믿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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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집 사고 집값도 알려주지 않는 남편… 저를 못 믿는 걸까요

입력
2020.06.0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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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남편은 여섯 살 많은 사업가입니다. 지인의 소개로 만나 1년도 안돼 결혼했어요. 결혼 후 남편은 지금까지 일, 가족 등 어느 문제도 저와 의논하지 않습니다. 특히 경제 문제는 심해요. 몇 년 전 집을 사고도 집값을 안 알려줄 정도였어요. 집값은 얼만지, 무슨 돈으로 샀는지를 물어봐도 ‘아 몰라, 대출받아서 샀어’가 끝입니다.좀 더 물어봐도 안 가르쳐 줍니다.

제 것도 다 남편 명의입니다. 자동차, 신용카드, 주식, 계좌 모두 그렇습니다. 단돈 10원도 제 마음대로 쓸 수 없습니다. 생활비도 자동이체금액과 카드사용금액만큼만 입금해줍니다. 뭘 사거나 내야 할 돈이 필요해지면 일일이 남편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한번은 동네 슈퍼에서 현금이 없어 만원 한 장 받아썼는데, 남편은 생활비에서 1만원을 빼고 입금하더군요.

남편은 매우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결혼할 때 예물로 시계를 고르더니 사지는 않고, 그만큼 현금으로 받아갔습니다. 친정 엄마 입원비로 수백 만원이 나왔는데 남편은 자신의 카드로 결제한 뒤 나중에 친정 부모님께 현금으로 받으라 했습니다. 남편의 행동이 부끄럽고, 또 화가 났습니다. 남편은 제가 결혼 전부터 해오던 저소득층 아동 후원금도 끊었습니다. 실수라고 하지만 불필요한 지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부모님 용돈도 명절, 생신, 어버이날을 빼곤 더 드리는 일이 없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남편은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이혼해서 조부모와 고모의 손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자랐어요. 사업가였던 시아버지는 여러 번 재혼했고, 남편과는 지금도 사이가 안 좋습니다. 시아버지는 남편의 생일 같은 걸 한번도 챙겨준 적 없다 합니다. 지금도 남편더러 “너 때문에 손해 보고 산 게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재산이나 집안일도 의논하지 않습니다.

남편은 육아, 가사는 모른 체 하고 자긴 돈만 벌어다 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조금만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으면 화를 냅니다. 한번은 크게 싸우다 저더러 “애들도 놔두고,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내 집에서 맨 몸으로 나가”라고 하더군요. 애들 다 키워놓으면 빈털터리로 내보낼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윤정희(가명ㆍ41ㆍ주부)


정희씨. 누구나 사생활이나 경제적 상황 같은 건 아무에게나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얘기들은 지극히 사적인 얘기여서입니다. 정희씨 남편은 왜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을까요. 그건 정희씨 남편이 사적인 얘기를 할 사람을 오로지 자기 자신만으로 정했기 때문이에요. 돈 문제에 있어서만은 자기밖에 믿질 않습니다. 남편이 허용한 소수 안에 당신이 들어가지 못하는 거지요.

남편에게 느끼는 그 깊은 외로움이 괴로울 겁니다. 남편이 남처럼 대우할 때 당신은 얼마나 섭섭하고 자존심이 상했을까요. 신뢰 받지 못하는 대상이라는 데서 오는 암담함이 클 겁니다. 화도 나고요.

‘남편이 생활비를 안 줬어, 밥을 굶기길 했어, 도대체 뭐가 문제야’라 생각할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결혼에 대해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희씨 부부에겐 가장 중요한 ‘함께’가 빠져 있습니다. 결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서 함께 살아가는 과정이 결혼입니다. 함께 산다는 건 생활을 함께 하면서, 희로애락을 나누는 거예요. 좋은 일에 서로 기뻐하고, 힘들 땐 서로 의지하고 같이 풀어나가고, 결혼 이전의 삶에 대해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고, 또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주며 함께 합니다.

결혼생활에서 경제도 중요한 부분이에요. 경제 상황을 서로 나누고, 의논하고, 계획하는 것도 함께 산다는 의미에 포함됩니다. 아이를 함께 낳아 기르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요. 남편이 돈을 벌 수 있었던 것도 당신이 가정을 잘 돌보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웠기 때문이지요. 정희씨 남편은 결혼의 본질적 의미에서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곤 말할 수 없을 지라도, 배우자에 대한 진정한 존중은 무엇이며 부부가 삶을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기분이 나쁘다고 배우자에게 어떻게 ‘맨몸으로 나가’라는 말을 합니까.

게티이미지뱅크

남편은 돈이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가족과 부부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사랑보다 숫자와 돈을 훨씬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이 번 돈은 아내와 의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내에게 필요한 만큼만 제공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모든 소유를 자신의 명의로 한다는 얘기는 ‘네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내가 너에게 줄지 말지 결정할 거야’라는 그릇된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 남편의 태도는 정희씨에게 큰 상처입니다.

배우자는 필요한 존재라기 보다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한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이지요. 배우자는 고용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희씨 남편은 아내를 필요 유무로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집이 어떤 공간인가요. 단순히 가족이 모여 사는 물질적 공간을 넘어 가족이 함께 휴식을 취하고, 안정을 느끼고, 성장하고, 사랑을 나누고, 보호받는 곳이어야 해요. 집은 명의나 가격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지요. 그런데 그 집에서 아내더러 나가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언행이고, 엄청난 상처를 주는 겁니다.

남편은 왜 돈만 중요하게 여길까요. 아마 성장과정에서 부정적인 영향 때문일 겁니다. 나름 경제적으로 성공한 그의 아버지는 재혼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 때 ‘여자들이 내 돈만 보고 결혼하고 내 돈만 뜯어갈 생각을 하네, 경제권은 여자에게 주면 안돼’라는 생각을 은연 중에라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아버지는 유일한 자식인 아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가족과 함께 한 행복했던 추억도 없고, 가족으로부터 가슴 먹먹한 감동도 느껴보지 못했고, 돈과 관련된 긍정적인 경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가족이나 결혼에 대한 생각도 비뚤어진 게 아닐까요. 정희씨 남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가엽지요. 그 어린 마음이 얼마나 추웠을까요.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을 너무 사랑하지만 한편으론 해결하지 못한 내면의 미성숙한 부분으로 인해 자식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요. 그래서 부모는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주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부모의 이런 부분은 절대 닮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경험이 있을수록 오히려 더 닮아가기도 합니다. 남편도 어릴 때 상처가 크고, 여전히 아버지와 잘 지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분명 아버지와 달라지고픈 부분들이 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남편 스스로 깊은 고민과 치열한 노력을 하지 못하고 있네요.

한 가정 내에서 경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고, 생활하고, 아이를 키우니까요. 하지만 사람보다 우선시될 순 없어요. 인간이 돈을 다루는 거지 돈이 사람을 다루는 게 아닙니다. 남편처럼 돈을 최고의 가치로 과대 평가하면, 정작 돈으로 살 수 없는 중요한 가치들을 모두 놓치기 마련입니다. 남편은 돈에 대한 개념도, 돈의 중요도에 대한 생각도 잘못 형성된 사람입니다. 남편 스스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 결혼의 의미는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정희씨 사연만 놓고 봤을 때 당신이 잘못한 건 없어요. 집안의 경제 상황을 알고 싶어하고, 의논하고 싶은 것은 마땅한 일이에요.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이고, 상대방에게 알려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있습니다. 돈으로 누군가를, 심지어 결혼으로 맺어진 배우자를 통제하려는 것은 매우 치사하고 비루한 것입니다. 남편으로부터 당신이 느꼈을 외로움과 분노, 좌절감, 모멸감, 그리고 남편에게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되지 못했을 때 내쫓길 수 있다는 불안감, 그 불안감으로 인한 비참함이 당신을 얼마나 괴롭게 했을까요.

내가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당신이 이제껏 살림하면서 애들을 사랑으로 키운 것은 애들을 사랑해서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결코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니라는 거예요. 남편이 당신의 노고를 인정하든 안 하든, 당신의 육아와 살림의 경제적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이 이제까지 가족을 위해서 살아왔던 삶은 가치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늘 성장합니다. 그 성장속도에 발맞춰 당신도 당신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더 해보고,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배우고, 배운 것을 돈을 버는 일과 연계도 해보는 등의 시도를 해보길 권합니다. 누구라도 경제적 활동을 하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남편이 돈 가지고 치사하게 굴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해서 그런 준비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남편이 그런 당신의 노력을 싫어하더라도 당신의 삶은 결코 남편이 아니라 당신 중심으로, 아이들의 성장속도에 발 맞춰 준비하기를 권합니다. 버는 돈이 얼마이건 간에 당신이 주체가 돼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해보십시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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