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사망 시위 격화, 혼돈의 워싱턴]
낮엔 평화시위 “폭력 옳지 않다는 사람조차 분노”
어두워지자 포력시위로 돌변… 곳곳서 약탈ㆍ방화
시위 일주일만에 140개市 확대, 40곳은 통행금지령
밀집 상태서 몇 시간씩 구호… 코로나 재창궐 우려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NO justice, NO peace)”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e)”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 앞 라파예트 광장에선 오후 내내 이 같은 함성이 계속됐다. 벌써 사흘 째 반복된 일상이다. 20대가 대부분인 시위대는 누군가 선창하면 모두가 따라 하는 구호를 몇 시간씩 계속 제창했다.
백악관에서 3km 가량 떨어진 하워드대에서 오후 2시쯤 모인 1,000여명의 젊은이들은 30여분간의 집회를 마친 뒤 백악관으로 향했다. 행진 내내 경찰의 통제에 잘 따랐고, 광장 도착 후에도 펜스를 사이에 두고 질서를 유지했다. 참가자들은 “쏘지 말라”는 구호와 함께 모두가 손을 드는 제스처로 평화시위의 성격도 분명히 했다.
낮 집회 참가자들은 야간 폭력시위에 거리를 두면서도 약탈과 방화에 대한 책임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물었다. 인근 메릴랜드주(州)에 거주하는 대학생 솔즈러 힐은 “폭력시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너무 화가 나 있다”면서 “정부가 시민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모른 채 분노만 자극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흑인 대학생 에이브릴은 “경찰과 폭력시위 모두에 유감이지만 폭력을 촉발한 건 경찰”이라고 했다. 다른 참가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테러집단으로 규정한 ‘안티파’에 대해서도 “그들이 옳지 않지만 왜 분노하는지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미국 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병이 여전한데도 개의치 않고 밀집한 시위대의 모습은 그만큼 분노가 크다는 것을 웅변하는 듯했다. 하지만 감염 우려가 가시진 않았다. 어깨가 맞닿을 만큼 근접해 구호를 외치는데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이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대규모 항의시위가 코로나19가 재창궐할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는 뮤리엘 바우저 시장의 우려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오후까지만 해도 시위대는 함성과 손팻말로만 의사를 표출해 경찰과의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상황이 돌변한 건 해가 진 뒤였다. 어둠이 내리면서 백악관 근처에서 폭력이 빈발했다. 요즘 미 전역에서 벌어지는 대혼란을 압축적으로 보는 듯했다. 일부 무리는 성조기를 불태웠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커피숍과 은행 창문 등을 부수고 다녔다. 깨진 창 틈을 비집고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모습도 보였다.
백악관 뒤편에 위치한 세인트존 교회 지하에선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도 발생했다. 2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이 교회의 벽면에는 ‘맞은편에 악마(트럼프)가 산다’는 낙서가 새겨져 있었다. 심지어 워싱턴을 상징하는 대표 건축물인 워싱턴기념탑 인근에서도 불길이 치솟았다.
경찰과 주(州)방위군이 최루탄과 고무탄 등을 쏘며 시위대 해산을 시도하면서 마찰은 더욱 커졌다. 순간 흑인 경찰 한 명이 바닥에 무릎을 끓어 시위대에 연대감을 표시하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고 참가자들은 전했다. 야간 폭력이 연일 재연되자 뮤리엘 바우저 시장은 이날 밤 11시를 기해 야간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흥분한 시위대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이런 장면이 140개 도시로 확대됐다”고 전했고,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도시만 40개가 넘은 것을 두고는 “1968년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암살 사건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시위 진압을 위해 방위군을 투입한 지역도 21개 주로 늘었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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