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이런 2막]교사ㆍ국회 보좌관ㆍ커피전문가…"지금의 인생은 덤이죠"

입력
2020.06.03 04:30
19면
0 0

인생 3모작…카페 ‘러디빈’ 사장 이평기씨

※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지난 달 27일 경기 평택시 오성면 창내리 카페 ' 러디빈'에서 이평기씨가 커피를 내리고 있다. 고영권 기자
지난 달 27일 경기 평택시 오성면 창내리 카페 ' 러디빈'에서 이평기씨가 커피를 내리고 있다. 고영권 기자

“국회 보좌관으로 3년간 있으면서 의미 있는 일도 많이 했죠. 하지만 현실 정치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명암도 뚜렷했습니다. 그때 머릿속을 스친 게 ‘커피’ 였습니다.”

지난달 27일 경기 평택의 카페 ‘러디빈’에서 만난 이평기(56) 사장 얘기다. 40대 후반이었던 2012년 카페를 연 이씨는 직전까지 국회에서 일했다. 18대 국회 때인 2008년부터 2011년까지 한나라당(현 미래통합당) 소속의 조전혁 전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다. 자유교원조합 초대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함께 일했던 조 전 의원이 국회에 입성하면서 손을 내민 게 계기였다. 조 전 의원 제안이 있기 전까지 그는 현실 정치에 참여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는 “정치를 피상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조 의원이 처음에 4급 보좌관을 제안했을 때 ‘왜 하필 1급도 아니고 4급을 하나’라는 생각도 했다”며 “그렇게 우연히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말했다.

여의도 입성 후 3년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소속 교사 실명 공개 등 ‘초보 보좌관’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이룬 일도 많았다고 평가한 그는 현실 정치에 대한 회의도 만만치 않았다고 했다. “정당은 이념을 비즈니스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정치에서 그렇지 못한 부분에 회의가 많았다”며 “발의 법안들도 서로 이해관계가 얽혀서 써 먹지도 못하는 상황도 그만 둔 계기”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국회를 떠날 무렵 그는 과거 근무했던 고교에서 행정실장 자리를 제안 받았다. 이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때인 1991년부터 평택의 한 여고에서 사회(교양철학) 과목을 가르쳤다. 중간에 잠시 교편을 내려놓기도 했지만 그의 본업을 굳이 따지자면 보좌관 이전에 교사다. 2017년 명예퇴직을 한 이후 카페를 같이 운영하고 있는 동갑내기 부인 허영이씨도 교사 출신이다. 이씨는 “교편을 잡다가 정치권에 몸 담았다 다시 카페를 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부인의 든든한 후원도 한몫 했다”고 귀띔했다.

지난 달 27일 경기 평택시 오성면 창내리 카페 ' 러디빈'에서 이평기씨가 커피 원두를 로스팅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지난 달 27일 경기 평택시 오성면 창내리 카페 ' 러디빈'에서 이평기씨가 커피 원두를 로스팅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잠시 본업으로 돌아갔지만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다소 자유롭게 일했던 몇 년에 비해 답답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 때 그의 인생을 또다시 설계할 재료로 평소 즐겨 찾던 ‘커피’가 떠올랐다. 대신 ‘업(業)’으로 삼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처럼 단순히 커피를 즐기는 ‘마니아’ 차원이 아닌 ‘전문가’가 되기 위한 준비도 그만큼 철저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1년간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는 동시에 커피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실제 그가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브랜드 커피는 콜롬비아와 에티오피아, 케냐, 인도네시아, 과테말라 산 원두를 같은 비율로 섞은 제품이다. 바리스타로서 수차례 연구를 한 끝에 얻어낸 맛이다. 그는 “같은 국가에서 생산된 원두도 품질 차이가 크다”며 “원두를 볶는 온도부터 바리스타의 스타일이 다 있는데 대중이 원하는 입맛에 맞춰 이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가 평택 시내에서 차량으로 15분 정도 떨어져 있는 지금의 자리에 카페를 차린 것은 지난 2016년이다. 2012년 개업 당시 평택 시내에 위치한 30평 매장에서 하루 최고 80만원 매출을 올릴 정도로 그의 커피는 꽤 입소문을 탔다. 인근 다른 지역에 분점까지 냈을 정도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졌다. 실제 지난해 시내 매장을 정리하면서 아들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주변 반경 1km 안에 4곳에 불과했던 카페가 8년 사이 20곳으로 늘었다. 뿐만 아니라 시내에 있다 보니 로스팅 기계에서 나오는 연기를 처리하는 제연기를 설치해야 하는 등 제약이 많았다.

시내가 아닌 외곽 널찍한 곳에서 카페를 운영하고자 마음먹었다. 평택 인근은 물론 강원도까지 찾아본 끝에 결국 지금의 창내리에 자리를 잡았다. 시내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이라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이 대부분이다. 최근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가 있긴 하지만, 이씨는 매주 수요일 커피 동호회 행사를 열어 진행하면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동호회 행사 때는 순수하게 커피 자체가 좋아서 만난 사람들끼리 직접 커피를 내려보고, 커피와 관련해 각자의 경험을 공유한다. 마니아뿐만 아니라 인접한 미군기지인 캠프 험프리스에 근무하는 미군들도 종종 찾을 정도로 지역에서는 입소문이 난 카페다.

지난달 27일 경기 평택시 오성면 창내리 카페 ' 러디빈' 정원에서 이평기씨가 꽃에 물을 주고 있다. 고영권 기자
지난달 27일 경기 평택시 오성면 창내리 카페 ' 러디빈' 정원에서 이평기씨가 꽃에 물을 주고 있다. 고영권 기자

인생 2막에 안정적으로 들어선 이씨지만 어느 순간부터 매출보다는 인생의 새로운 무대에서 시작한 일의 가치를 곱씹고 있다고 했다. 그는 “매출을 생각하고 카페를 유지하는 데 갈수록 한계가 있다”면서 4년 만에 카페를 운영하는 철학도 변했다고 말했다. 때문에 카페 창업을 준비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는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철학을 확고하게 전달한다고 했다. “인생 2모작을 위해 오는 중ㆍ장년층 분 중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하면 대부분 포기하라고 조언한다”면서 “50대 후반 들어서면 애들 학비도 끝나고 사실상 2모작을 하나의 덤으로 생각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인생의 무대에 들어선 지 8년이 지나면서 이제 육십 줄을 바라보고 있는 그다. 앞으로의 시간도 지나온 시간 못지 않게 중요하다. 지난 삶의 궤적을 통해 가까운 미래도 그리고 있다. 그는 “여건이 된다면 정치와 커피 얘기를 함께할 수 있는 카페를 서울 여의도 인근에 열고 싶다”고 말했다. 몰락한 보수 당에 대한 일침도 빼놓지 않았다. “지금 보수는 지적인 게으름에 빠져 있다. 진정한 보수가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부터 알고 시작해야 한다”고.

김성환 기자 bluebird@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