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4대째 붓 제작하는 백제필방
대전 중구 대흥동 중구청사 맞은편 필방거리에 자리한 백제 필방. 가게를 알리는 간판 가운데에 ‘붓 직접생산’ 이라는 큰 글씨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 밑 유리에는 ‘전통 우리붓 4대째 직접제작’이라는 글씨로 이 집의 내력을 강조하고 있다.
백제필방 장대근(67) 대표는 4대를 이어 가업인 붓을 제조해 판매하는 ‘붓장이’다. 붓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다. 문방사우는 옛날 선비들이 책을 읽고 글씨를 쓰는 글방의 네 가지 벗으로 종이, 붓, 벼루, 먹을 일컫는다.
그의 집안에서 언제부터 붓을 제작하기 시작했는지 장대표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선친 등을 통해 들은 바로는 조부인 장재덕(1890~1967)이 붓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 왔다는 것이다. 장 대표는 “가업으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기술을 전수 받았다면 아마 증조할아버지로부터였지 않았을까 싶다”며 “그렇다면 집안 붓 제조역사는 확실히 100년 이상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장 대표는 4대 가업을 조부와 부, 본인 그리고 자신의 기술을 전수받은 딸 지은(42)씨까지로 정리하고 있다. 그의 이런 내력과 붓 만드는 과정은 공주대 구중회 명예교수가 저술한 <붓은 없고 筆만 있다>에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장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조부 장재덕은 지금은 전주시로 편입된 전북 완주군 상관면 죽음리의 집 사랑채 공방에서 붓을 만들어 생활을 꾸려왔다. 집 뒷산인 고덕산 이름을 따서 이들이 만든 붓은 ‘고덕붓’으로 불렸다.
그는 “조부께서는 재료가 확보되면 산간지방이나 시골장터, 서당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붓을 만들어주곤 했다고 들었다”며 “농사철이 끝나는 11월부터는 붓 재료인 털을 구입하러 전국을 누볐고, 서당 훈장들이 모아두었던 털을 내밀며 붓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만들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붓 제조기술은 아버지인 장영복(1923~1982)을 거쳐 장 대표가 이어받았다. 장 대표가 부친의 권유로 붓 만들기에 입문한 것은 고교 1학년때인 열 일곱 살 때였다.
장 대표는 “아버지의 붓 만드는 일을 도와주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며 “가업을 이으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서운하기는 했지만 거역하지 않고 학교에 자퇴원서를 냈다”고 밝혔다.
그는 “아마 아버지 입장에서 아들이 공부를 계속해서 소위 ‘먹물’이 들어가면 가업을 이어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며 “언젠가는 내가 가업을 이어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은 갖고 있던 타라 학업 중단에 큰 불만을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이 길로 들어선 것은 아버지 권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대를 이어서 전통문화를 지킨다는 거창한 사명감을 갖고 붓 만들기를 이어받은 것은 아니었다”며 “고교, 대학을 나와도 그럴듯한 일자리를 갖기 어려웠던 당시 상황, 또 붓을 만들어 파는 수입이 대학 나온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던 점도 감안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전주서 같이 붓을 만들던 부친이 돌아가시자 자신만의 기술 개발에 매진했다. 부친으로부터는 정리된 털로 가늘게 붓끝을 만드는 기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동시에 전국의 유명 붓 장인들을 찾아 그들의 공방에서 기술자로 일하며 붓 만드는 방식과 기술을 습득했다.
그러다 대전의 지금 자리에 정착한 것은 1980년대 초의 일이다. 대전은 일제의 철로 부설과 함께 성장한 신흥도시여서 붓 등 전통공예 분야는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그의 대전 정착으로 대전지역 서예가나 한국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서울 인사동이나 다른 지역에 붓을 주문하는 일이 줄었다.
현대사회로 오면서 전문적으로 붓을 만드는 기술은 관련 책자 보급과 기술정보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대동소이해졌다. 하지만 그는 지하 공방에서 털을 고르고 붓대를 만드는 고된 작업을 하면서 ‘장대근’ 만의 제조법을 축적, 발전시켜 나갔다.
그런 노력은 특허로도 이어졌다. ‘배냇머리, 인조모, 겸호가 함유된 붓의 제조방법과 이를 함유한 붓’ 기술로 2003년 11월 특허등록을 받았다. 배냇머리는 태어난 뒤 한번도 깎지 않은 간난아이의 머리카락이다. 생에 한번만 나오는 재료이기에, 실제 사용되지는 않더라도, 아이 출생 기념으로 제작하는 것이어서 의미가 적지 않다.
붓은 붓자루와 직접 글씨를 쓰는 털로 만들어진 붓촉으로 구성된다. 예부터 붓을 만드는 사람들이 좋은 붓의 요건으로 드는 것이 ‘첨제원건(尖濟圓建)’이다. 첨은 붓을 모으면 끝이 뾰족해야지 뭉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제는 붓털을 쥘부채처럼 펼쳤을 때 중간에 갈라짐이 없고 붓끝이 가지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원은 붓끝 주위가 둥근 송곳 모양을 하면서 어느 한쪽이 홀쭉하거나 빠져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이며, 건은 탄력성이 풍부해 붓을 눌러쓴 다음 다시 거두어들일 때 휘었던 붓 털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붓 만들기는 크게 붓촉과 자루를 만드는 공정으로 나뉜다. 붓촉 만들기는 심소(붓촉의 탄력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안쪽에 강한 털을 넣는 중심 부분)와 의체(심소의 바깥을 둘러싸는 둘레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 과정에서 털을 용도에 따라 고르고 기름기를 빼고 정리하며, 종류별로 섞는 구체적인 단계를 거친다.
장 대표는 붓 만드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정성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원료구입부터 신중을 기한다. 좋은 털이 있다면 국내외를 마다하지 않는다. 요즘도 몽골과 러시아의 털 수집상으로부터 좋은 털을 갖고 있다는 연락이 오면 달려 간다.
나이가 들면서 장 대표가 만드는 붓 수도 줄어들고 있다. 요즘은 하루 4, 5자루 정도를 만들 뿐이다. 하지만 그 모두 비범한 것들이다. 붓을 사용하는 사람의 취향과 성격이 저마다 다를 수 있고, 그들의 취향에 맞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글씨체를 쓰고, 어떤 글씨체로 창작을 하는지 설명을 들은 뒤에야 제작에 들어간다”며 “세상에 하나 뿐인, 주문자에게 딱 맞는 붓을 만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사용자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거기에 최대치로 부합하는 물건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게 장 대표의 붓 만들기 철학이기도 하다. “특정 붓만 만들어 판다면 그 붓에 맞는 글씨를 쓰는 사람만 선호하게 될 것”이라는 인식도 갖고 있는 그다.
그렇지만 그가 가장 자부심을 느낄 때는 서예 대가들로부터 ‘알아서 만들어 오라’는 식의 주문을 받을 때다. “그 분들이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글씨 쓰기 좋은 붓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그 만큼 저를, 제 기술을 믿는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일을 딸에게 물려주는 일에도 스스럼없다. “붓은 사용하는 사람들이 인정해주어야 비로소 붓이 된다. 아무리 빼어난 솜씨를 가졌더라도 사용자가 원하는 붓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격이 없다. 빨리,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떤 재료를 사용하고 얼마만큼 쓰임새 있게 훌륭하게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붓은 마음으로 만들어야 한다. 첫째도 정성이요, 둘째도 정성이어야 한다.” 딸에게 이어지는 그의 당부다.
그는 젊은 시절 지방자치단체 무형문화재 지정을 꿈꾸었지만, 심사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불발됐다. “그 덕분에 멀리서도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붓 만드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장 대표는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기술에 대한 자존심 하나로 버텨 나가는 게 장인”이라며 “지금 이 붓이 대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여생을 바칠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글ㆍ사진 허택회 기자 thhe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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