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19> 영조의 옛 공신 초상 감상
영조(1694~1776ㆍ재위 1724~1776)는 서화에 많은 관심을 가진 왕이었다. 수집한 서화와 서책의 목록을 적어 책을 만들기도 했으며, 직접 갈 수 없는 장소에 대해 그림을 그려오게 하여 확인하기도 했다. 특히 초상화에 관심이 깊었는데,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는 옛 공신(功臣)의 초상을 궁궐 안으로 갖고 오게 하여 용모를 확인하고 찬문(贊文)을 지어 내린 사례를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영조는 공신 초상을 감상하기 위해 초상의 존재 여부를 수소문하거나 때로는 독촉하여 궁궐 안으로 가져오게 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나라와 왕을 위해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는 공신의 칭호, 경제적인 포상을 비롯하여 가족에 대한 특혜 등 여러 가지 포상이 주어졌다. 공신 초상은 이들에게 베풀어진 포상 중 하나다. 왕명에 의해 당대 최고의 화원에게 그리게 하여 하사하였고, 당연히 신하들은 매우 큰 명예로 여겼다. 또한 가문에서는 이를 가보(家寶)로 섬기며 대를 이어 지켜 왔다.
공신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던, 선대(先代) 왕이 내려준 옛 공신 초상에 대한 영조의 관심은 단순히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신 초상을 자신의 신하들과 함께 보며 공적(功績)을 치하하였는데, 이는 옛 공신의 모습을 본보기로 삼고 국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을 다짐받고자 했던 의도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이 같은 맥락 속에서 영조가 감상한 공신 초상 중 대표적인 것이 ‘익안대군 영정’이다.
1746년(영조 22) 영조는 익안대군의 11대손 이정희(李鼎熙ㆍ1699~1773)를 궁으로 불러 익안대군 영정을 친히 열람하며 일렀다. “익안대군의 상(像)이 아직까지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보고 싶은 마음이 깊어져 날을 꼽으며 기다렸는데 오늘 드디어 보게 되니 그 기쁨이 배가 된다”고 감회를 되뇌며 그림 또한 꽤 잘 그린 솜씨라고 평하였다.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ㆍ1359~1404)는 조선 왕조의 탄생과 개국 초 나라의 질서를 마련하는 데 공을 세운 공신이자 조선의 왕자이다. 그는 태조와 신의왕후의 셋째 아들로 제2대 왕 정종의 동생이자 제3대왕 태종의 형인데, 조선 개국을 소재로 한 사극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 적이 없는 만큼 대중에게 익숙한 인물은 아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훗날 태종)을 도와 난을 평정하여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책록되었고, 조선 개국의 공을 뒤늦게 인정 받아 같은 해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추록되어 공신 초상을 하사 받았다.
영조가 감상한 것은 공신에 책록됐을 당시 제작된 것이 아닌 1734년(영조 10)에 다시 그린 이모본(移摹本)이었다. 원본이 아닌 이모본을 감상했던 것은 ‘익안대군 안양공실기’에서 연유를 찾을 수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한음(漢陰ㆍ서울로 추정됨)에 살던 익안대군의 7대 사손(祀孫) 이창영(李昌榮ㆍ 1571~1637)과 온 가족이 익안대군의 신주와 영정을 등에 짊어지고 경기 여주를 거쳐 강원(간성 또는 원주 지역) 산악으로 피난을 떠났다. 전쟁의 피난길 속에서도 조상에 대한 공경의 마음과 후손들의 애틋한 노력으로 익안대군 영정은 다행히 유실되지 않았으나,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상태는 온전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734년(영조 10) 10대손 완계군 이만준(李萬俊ㆍ1670~1753)은 영정이 훗날 더욱 검게 되고 원래의 모습을 잃을까 염려하며 후손들과 뜻을 모아 장득만(張得萬ㆍ‘승정원일기’에는 장덕만(張德萬)으로 기록됐는데 둘 다 도화서 화원으로 형제 관계)에게 청하여 그리고, 장황(粧䌙ㆍ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 책이나 화첩, 족자 따위를 꾸미어 만듦)하여 구본(舊本ㆍ공신 책록 당시 제작한 원본)과 함께 봉안하였다. 이만준의 아들 이정희는 이때 새로 그린 익안대군의 영정을 영조에게 보였던 것이다.
영조는 영정의 여백에 직접 ‘익안대군 유상, 1746년(영조 22년) 가을에 삼가 쓴다’(益安大君遺像 崇禎紀元後百三年 柔兆攝提季秋謹書)라는 어필 표제와 개국공신과 정사공신에 책록되었던 사실을 짤막하게 기록하였다(‘純忠奮義佐命開國元勳 洪武壬申. 推忠協賛靖難定社錄勳 洪武戊寅.’).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승정원일기’에 전하는데, 어필 표제를 쓰면서 그만 실수로 글자의 한 획을 더 넣어버린 것이다. 이에 당시 이모본 영정을 그렸던 화사 장덕만에게 잘못 쓴 획을 고치게 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은 화사가 감히 어필을 보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반대하였고 결국 회장(回粧ㆍ그림 주변의 비단 장황 부분)을 넓게 하여 실수로 넣은 획을 덮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영조의 옷 소매에 묻은 먹이 화본(畵本)에도 옮겨 묻는 일이 발생한다. 다행히 익안대군의 상(像)에는 묻지 않았지만 먹 자국이 흠이 될 수 있기에 분으로 지우도록 명했다. 이에 신하가 오히려 더 번질까 염려하자 영조는 “정성이 있다면 쇠와 돌도 뚫는 것처럼 지워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고 결국에는 모두 지워냈다고 전해진다.
영정을 감상하면서 발생한 예기치 못한 두 차례의 실수 때문이었는지, 본래 영정 장황(粧䌙)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였는지 확실치 않지만 영조는 새롭게 장황하고 영정을 넣는 함도 만들어 내리도록 명했다. 이때 사용하는 장황 비단 색과 무늬, 족자 축의 나무 종류, 보자기의 색까지 세세하게 지시하였다.
영정을 모실 수 있도록 영당(影堂)도 건립해 주었고, 묘소에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ㆍ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던 일)하였으며 후손에게는 관직까지 주는 등 각별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들은 태조의 아들들이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피의 다툼을 했던 것과 달리 익안대군은 유연한 성품으로 오히려 동생인 태종의 편에서 그의 왕위 등극을 돕고 깊은 우애를 나누었던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영조는 이복형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초기인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ㆍ1695~1728)를 비롯한 소론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밀풍군(密豊君ㆍ?~1729)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이인좌의 난은 평정되어 곧 정치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지만 이런 사건들은 영조로 하여금 보다 강력한 권위와 지지층을 필요로 하게 했다.
서화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영조는 공신 초상의 감상을 통해 공신이 지닌 의미를 되새기고 초상화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이끌어 내고자 했던 것이다. 즉 단순한 그림 감상이 아닌 치세(治世)를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영조가 감상한 또 다른 공신 초상 ‘이지란 초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지란(李之蘭ㆍ1331~1402)은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태종의 편에서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개국ㆍ정사ㆍ좌명 삼공신에 책록된 인물이다. 이지란 초상이 후손의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초상을 가져오게 하여 친히 열람하였고 공을 기리는 치제문을 지어 내렸다.
이지란은 태조와 의형제를 맺은 각별한 관계이자 국초 혼란스러운 나라의 기틀을 정비하는 데 공을 세운 공신이었다. 왕권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던 영조에게 이지란은 충신의 표본 중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에 봉해진 정충신(鄭忠信ㆍ1576~1636)과 장만(張晩ㆍ 1566~1629)의 초상을 감상하고 공을 크게 평가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왕이 내린 초상, 당대 최고 화원에 의해 그려진 공신 초상은 공신에 책록된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르기까지 귀감이 되었고, 때로는 국왕의 정치적 목적으로 감상되기도 했음을 영조의 여러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안보라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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