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절박한 우리 일상… 아찔한 ‘굴뚝’은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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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절박한 우리 일상… 아찔한 ‘굴뚝’은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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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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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게 마지막이야’는 남편 대신 편의점 노동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정화와 그를 찾아오는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개개인의 일상을 노동의 관점에서 들여다본다. 연우무대 제공

새도 둥지를 짓지 않는다는 75m 굴뚝 위에 사람이 있다. 감옥의 독방보다 더한 곳에 자신을 가두고 426일을 견뎠다. 그래도 무사히 땅을 밟으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여겼다. 그게 당신과 우리의 ‘약속’이니까.

“높은 곳에서 내려오더니, 이젠 깊은 곳으로 내려갔어.” 하늘 감옥에서 돌아온 남편은 세상과 단절하고 집안 깊숙이 스스로 만든 감옥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내 정화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희망 없는 일상을 버틴다.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는 고공 농성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아찔한 굴뚝을 보여주지도, 노동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지만, 극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일상이 매 순간 절박한 생존 투쟁이라고 말한다.

무대는 소박하다. 정화가 일하는 편의점뿐. 물건을 정리하고 손님을 맞이하던 정화에게 사람들이 찾아온다. 석 달치 밀린 회비를 받아야 하는 학습지 교사 선영, 떼인 추가 임금을 받으려는 전 아르바이트생 보람, 빌려간 돈 300만원을 돌려달라는 남편의 옛 동료 명호까지. 정화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융통을 부탁한다. “이게 마지막이야.”

남편도 그렇게 말했다. 굴뚝에 올라가면서, 굴뚝 위에서 단식을 시작하면서, 농성이 끝난 뒤 동료들과 흩어지면서, 매번 “이게 마지막이야”라고. 돈을 빌리려고 부탁하는 정화의 ‘마지막’은, 남편과 그 동료들의 ‘마지막’은, 늘 그렇게 되풀이되고 있는지 모른다.

반복되는 ‘마지막’은, 우리 사회에서 무시된 숱한 ‘약속’들을 드러내 보인다. 지켜지지 않은 사회적 합의, 그로 인해 연쇄적으로 파기된 또 다른 약속들이 평범한 삶을 낭떠러지로 내몰아간다. 어디에나 있는 철탑, 크레인, 송전탑, 굴뚝, 전광판, 망루, 교각은 그래서 위태롭다. 자의든 타의든 살짝만 벗어나도 추락이다.

분 단위로 쪼개어 직원의 업무를 평가하고 추가 노동을 당연시하는 점장(왼쪽)은 관객의 공분을 자아낸다. 연우무대 제공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당위’가 아닌 ‘공감’의 힘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이다. 왜 점장에게 임금 청구서를 전달하지 않았냐며 정화를 원망하는 보람도, “내가 잘리지 않으려면 하루 1만원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선영도, 집안 일로 목돈이 필요한 명호도, 저마다 절박한 사정으로 가슴을 쥐게 만든다.

정화를 궁지로 내모는 이, 책임을 져야 하는 이는 대체 누구인가. 정화와 각 인물들이 차례차례 대면하는 방식으로 극의 긴장감도 차곡차곡 쌓여가고, 그러면서 극장 밖 현실이 무대 위로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드라마’ 자체로도 손색없다.

지난해 한국연극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연극’ 중 하나다. 다음달 열릴 백상예술대상의 백상연극상 후보로도 올라 있다. 이연주 작가와 이양구 연출은 파인텍 노동자들의 426일 고공 농성 현장에 있던 정소은 프로듀서를 만나 이 극을 만들었다. 연우무대가 올해 제작을 맡았다.

‘연중무휴 24시간’ 끝없는 노동의 상징인 편의점을 점거한 보람은 포스트잇에 한 글자씩 써 붙인다. “근로기준법‘은’ 준수하라.” 정화는 열쇠를 찾고도 문을 열지 않는다. 그리고 전화를 건 점장에게 말한다. “여기로 와라, 거기서는 알 수 없다.”

굴뚝에 올라가지 않고는 알 도리가 없다. 아찔한 생존의 무게를, 아득히 먼 희망의 거리를. 31일까지 서울 혜화동 연우소극장.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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