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직은 정책결정 왜곡과 비용 초래
지지그룹이 거짓을 정당화할 수 없어
‘무균 정치문화’로 격상 계기되어야
1980년대 초, 필자의 미국 뉴욕 맨해튼 유학시절, 천신만고 끝에 입주했던 기숙 아파트의 2년 임대 기간이 끝나 주변의 비싼 민간 아파트로 옮겨야 했다. 고민 끝에 대학의 ‘주택관리책임자’를 찾아가 500달러에 불과한 은행 잔고증명서를 보여주며,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대학 밖의 민간아파트를 구할 형편이 안 되니 박사 논문을 끝낼 수 있는 2년 기간까지 연장해 달라고 읍소했다. 나는 민간 아파트의 비싼 임차료를 지불하기 위해 유학생으로서 허용되지 않는 ‘불법 취업’을 할 수 없다고 첨언했다. 사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최선의 노력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도한 것이었는데, ‘주택관리 책임자’는 나를 한참 응시하더니 즉석에서 2년 연장을 허락하며 순조로운 박사 학위 완결을 격려했다. 그는 일부 한국 유학생들이 부모님이나 가족의 유고 등 감성적으로 거절하기 어려운 사유를 들어 아파트 연장을 요청하곤 하는데, “경제적 여력이 없어 연장이 긴요하다”라고 솔직ㆍ담백하게 주장하는 학생은 당신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의 언급에는 일부 학생들이 기숙 아파트 연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불가피한 사유를 만들어 자신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언중유골(言中有骨)’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아무리 곤경에 처했더라도 이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은 물론이고 사실을 과장ㆍ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평범한 지혜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21대 총선 당선자의 ‘정의기억연대’ 공금 사용과 관련된 의혹이 불거지면서 선출직 공직자의 기본 자질이 새삼 유권자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선출직 공직자가 가져야 할 기본 덕목으로 ‘정직, 인내, 포용’을 꼽고 싶다. 평범한 시민들마저 이러한 덕목을 갖추고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물며 공적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선출직 공직자들이야말로 일반인들과 달리 이러한 덕목이 선택적 차원이 아닌 진정으로 체화되어야 할 필수적 요건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말과 행동의 일관된 정직성은 역량과 이념, 그리고 유권자의 지지 강도를 불문하고 반드시 갖추어야 할 양보할 수 없는 필요조건이라는 점을 결코 유연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공직자는 일반인들과 달리 자신의 정직성에 대한 의구심의 시선마저도 건실하게 응답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1970년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탄핵되기 직전에 사임했던 것도 불법도청 사건 자체보다 대응 과정에서의 거짓말에 기인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도 ‘무능함은 이해할 수 있어도 거짓은 용서할 수 없다’라는 믿음이 유권자들의 의식 속에 견고히 자리 잡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거짓 언행에 익숙한 정치인은 자연 도태될 수밖에 없고, 정치권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높아질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 정치인 또는 고위공직자의 거짓말을 둘러싸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라는 관용의 물줄기가 존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를 불식할 수 없다. 특히 정치적 지지그룹의 존재가 뚜렷할 경우 해당 정치인에 대한 일관된 지지가 가져오는 집단편익이 불가피한 거짓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시각은 교정되어야 한다. 거짓을 정치과정의 파생적 문제로 인식하는 행태는 보편적 가치 실현을 위한 대의민주주의 발전의 제약 요소가 됨이 분명하다. 개인의 거짓말은 개인 차원의 인격적 결함으로 지나칠 수 있지만 공직자의 거짓은 공공의 정책결정을 왜곡시킴으로써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지대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지지그룹의 존재가 정치인의 거짓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의혹을 받고 있는 정치인들은 지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그것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것이 공직자로서 진정한 용기를 발휘하는 길이다. 우리나라가 코로나 방역과 치유 노력에 있어 모범국가로 부상한 것처럼 정치인의 거짓이 존립할 수 없는 무균 정치문화를 갖춘 정치 모범국가로 한 단계 격상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오연천 울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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