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11주기 앞두고 부산서 재선 성공한 전재수 의원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원내선임부대표가 19일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회고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재수는 내 옆에 앉아라. 내가 부산에서 받은 득표가 36%가 최고였는데, 전재수가 이번에 내보다 더 많이 받았다. 39%나 받았다.”

12년 전인 18대 총선에서 ‘세 번째 낙선’이란 성적표를 받아 든 전재수(49ㆍ부산 북강서갑)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건넨 말이다. 2008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로 부산ㆍ경남 낙선자들을 모두 불러 격려하던 자리에서다. 전 의원은 “피폐하다 못해 마음이 너덜너덜하던 시기였는데, ‘실망하지 말고 힘들어도 계속 해달라’는 말씀으로 들렸다”고 했다.

전 의원은 21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노 전 대통령 11주기를 한 달 여 앞둔 시점이었다. 전 의원의 지역구는 지켰지만 민주당의 부산 의석은 6석에서 3석으로 ‘반토막’ 났다.

전 의원은 선거 자원봉사자로, 청와대 행정관ㆍ제2부속실장으로, 노 전 대통령과 10년을 함께 했다. 그런 그가 민주당에 여전히 만만치 않은 부산에서 정치를 이어간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1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전 의원은 “부산에서 ‘노무현의 꿈’은 상당 부분 실현되고 있다”고 운을 뗐다.

부산시당위원장으로 선거를 치른 그는 “민주당 의석은 줄었지만, 소선거구제의 한계가 컸다. 득표율을 놓고 보면 범 진보가 얻은 표가 40%가 넘는다”며 의미를 찾았다. 또 “과거엔 저를 응원한다는 분을 만날 기회가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는데 이젠 지하철에서도 힘껏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늘었다”며 “노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한 많은 분들의 도전의 역사가 이런 변화를 만들었다는 생각 속에 이번 총선을 치렀다”고 했다.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원내선임부대표가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본보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부산 북구ㆍ강서구는 노 전 대통령이 서울 종로를 포기하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도전했던 지역이다. 당시 북구 출신 국회 인턴이었던 전 의원은 노 전 대통령 선거캠프에 자원봉사자로 합류했다. 전 의원은 “화명동 담당 자원봉사자로 노 전 대통령이 오시면 함께 유세를 다녔는데, 그 때부터 근원적 질문을 하셔서 제가 충격도 받고 당황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내가 일한 성과와 공약, 내가 정치인으로 걸어온 길과 비전을 가지고 표를 달라고 해야지, 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친한 척을 하며 표를 달라고 해야 하냐’고 하시는 거에요. 여느 후보들과는 다른, 범상치 않은 분이셨죠(웃음).”

진보 진영에 대한 민심이 냉담할 때라, 노 전 대통령이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공터에서 허공에 대고 연설한 일화는 유명하다. 전 의원은 “‘노무현’ 하면 그래도 스타 정치인인데 그 정도로 싸늘한 현장을 보면서 ‘정치가 이런 것이구나’하는 충격도 받았다”며 “제가 더 미안하고 어찌할 줄을 모르는 순간이 많았는데, 노 전 대통령은 멋쩍게 웃어 넘겼다”고 기억했다.

노 전 대통령이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직접 보고도 스스로 부산에서 줄곧 정치를 해 나가는 큰 이유를 전 의원은 “부채 의식”이라고 설명했다. “지역주의 극복은 말로 굳이 하지 않아도 당연한 전제인 것이고, 실은 제가 피폐해질 때마다 일부러 데려다 일을 시키며 격려 해주신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대한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그에게 노 전 대통령은 ‘늘 공부하는 남다른 지도자’ ‘관행과 타성을 모두 회의하게 만든 지도자’다. 전 의원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고, 산산조각 낸 점이 노무현 정신의 핵심 아니겠냐”며 “선거 제도, 정치 대연정 제안, 국가 균형 발전, 지방 분권의 문제 등 여러 이슈에서 앞서 갔고, 때로는 그 점 때문에 외로워했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는 외롭게 동동 떠있는 섬 같았다는 것이다.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방 분권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했다. 이한호 기자

문재인 정부와 ‘177석의 슈퍼 여당’의 상황은 전 의원에게 격세지감이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지금 모습을 보셨으면 잠깐 좋아하시고 엄청 많은 주문을 하셨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노무현의 꿈’ 중 권력기관 개혁과 선거제 개혁 등은 진행 중이지만, 국가 균형발전과 지방 분권은 남은 과제가 많다고 했다. 그는 “서울ㆍ수도권 중심의 일극주의가 뿌리깊게 쌓여 내재화됐는데, 인구 이탈, 산업기반 붕괴 등으로 지방에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며 “개헌을 포함해 지역의 창의적 에너지를 살릴 길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이 꿈꿨던 세상은 관념적으로는 ‘사람 사는 세상’인데, 그 바람과 꿈이 많은 국민들께 이미 스며들고 에너지가 돼 있는 것 같아요. 전적으로 그런 국민의 힘으로 우리가 5월마다 노무현의 꿈을 떠올리고,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와중인 거죠.”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원내선임부대표가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본보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 다음은 일문일답 전문. 
 -부산 재선의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제가 세 번째 낙선했을 때 2008년에 부산 경남 낙선자만 봉하마을에 불러 주셨는데, ‘내가 36%가 최고였는데 전재수가 내보다 더 많이 받았다’ 하시던 말씀이 선하다. 그러니까 계속 하란 말씀이었다. (웃음)”

 -부울경 분위기가 만만치 않았다. 

“제가 부산시당위원장을 맡아서 총선을 이끌었다. 인사말을 하게 되면 빠뜨리지 않았던 게 ‘오늘날 우리가 부산시당, 구청장 자원 등을 가지고 선거를 치를 수 있는 것은 앞서서 지역주의에 맞서 깨지고 무릎꿇림 당하고, 전갱이(전강이) 깨지면서 투쟁했던 분들이 있었던 덕분’이라는 거다. 바로 노 대통령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그런 심정으로 선거를 치렀다.

물론 부산 의석이 3석으로 줄긴 했지만, 소선거구제의 한계가 컸다. 득표율을 놓고 보면 범 진보가 얻은 표가 40%가 넘는다. 부산에서 노무현의 꿈은 상당 부분 진행이 되고 있다.”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다섯 번의 선거를 치렀는데 불과 10년, 6년 전엔 지지자 만날 기회가 드물었다. ‘당원이다’ ‘응원한다’ 하는 분들이 가뭄에 콩 나듯 적었다. 이제는 지하철에서도 ‘저 권리당원이에요. 힘내세요’ 하고 힘껏 응원해주는 분들이 많다. 정말 한 말씀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감동스러울 정도로 드물었던 격려의 말씀들이 이제는 더 많은 분들로부터 더 따뜻하게 온다. 이 변화의 결정적 계기를 만든 모든 것이 노 대통령을 시작으로 한 많은 분들이 도전의 역사였다.”

 -노 전 대통령의 2000년 부산 출마 때 유세 수행을 했는데. 

“제가 1999년 대학원 졸업하고 처음으로 국회에 인턴 제도가 생겨 일하고 있었다. 당시 서갑원 의원께서 ‘노무현이라는 분이 부산에 출마한다’고 하셨다. 제 고향이기도 하고 평소 좋아하던 터라 캠프에 합류했다. 저는 화명동 담당 자원봉사자로, 후보가 오시면 모시고 유세를 다녔다.”

 -당시 기억은. 

“당시부터 근원적ㆍ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분이었다. 보통 출마하는 사람들, 정치하는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도 마치 잘 아는 사람인양 친하게 다가가지 않나. 지역에 골목 상권, 전통 시장 다니면서 인사하는 것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나. 그런데 ‘내가 왜 거기 가야 하는데’ 하셨다. ‘일한 성과를 가지고, 공약을 가지고, 그 동안 내가 정치인으로 걸어온 길과 비전을 가지고 표를 달라고 당당하게 이야기 해야지 왜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친한 척을 하며 표를 달라고 해야 하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다.”

 -당황스러웠겠다. 

“충격적이었다(웃음). 제 입장에선 그래도 어떻든 모시고 한 명이라도 더 만나려고 했다. 화명동은 유권자가 가장 많다. 그때부터 토론, 원칙에 강하지만 스킨십에 능한 분은 아니었다. 여느 정치인들처럼 일반 유권자들에게 아주 친숙하게 다가가고, 스스럼 없이 말을 걸고, 친한 척을 하고, 처음 봤는데도 열 번 본 것처럼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웃음).”

 -캠프에서 고생이 많았겠다. 

“당시 제 사수가 백원우 민주연구원 부원장, 후보 전체 수행은 송인배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이었다. 당시 안희정 전 충남지사, 이광재 전 강원지사 등도 다 그 선거 때문에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후보만 그런 게 아니었다. 사랑방 좌담회라는 것을 자주 했다. 주민 분들을 스무 분, 많을 때는 백 분을 모셔놓고 ‘왜 노무현이 돼야 하는가’를 설득하는 거다. 후보가 못 오는 경우에는 연사로 투입됐던 분이 이광재, 안희정 이런 선배들이다. 안 전 지사는 앉으면 아담 스미스 국부론, 칼 맑스 이런 이야기를 해서 인기가 제일 없었다. 어느 날에는 더 큰 규모로 100분 150분을 모셔놨는데 당시 후보인 노 대통령이 오셔서 6월 항쟁, 노동자 대투쟁 이런 이야기를 꺼내셨다.

당시 주민들이 관심 많았던 것이 고등학교 설립 문제, 폐기물 소각장 철거 문제 이런 거였다. 저희가 힘들게 고생해서 ‘정말 와서 들어보시면 도움이 될 거다’해서 주민들을 모아놨더니 분위기가 그랬다. 우리끼리 ‘좌담회를 할수록 다 표가 떨어져 뿐다’고 그랬다(웃음). 말하자면, 급하다고 지역 현안도 다 해주겠다고 하며 선거를 치르는 후보들과는 다른, 범상치 않은 분이었다”

 -당시 부산 분위기가 다소 냉담했을 텐데. 

“그랬다. ‘정치가 이런 것인가’ 하는 충격도 받았다. 노무현 하면 그래도 스타 정치인, 게다가 종로를 버리고 내려온 후보였는데 반응이 싸늘한 데 놀랐다. 한편으론 아 정치라는 것이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는 거라더니 선거 운동이야 말로 뻘 밭을 닦는 일이구나 싶었다. 제가 더 미안하고 어찌할 줄을 모르는 순간이 많았다. 큰 공터에서 유세 연설을 하는데 듣는 사람이 그야말로 아무도 없고, 있는 사람 몇 명이라고 해봐야 우리 운동원만 있는 곳에서 하다 말문이 막히시기도 했다. 나중엔 그 멋쩍은 상황을 가리켜서 ‘우습죠?’하고 웃어 넘기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쭉 보면서도 부산에서 정치를 시작했던 마음은 무엇이었나. 지역주의 극복의 염원이 그만큼 컸나. 

“그건(지역주의) 말로 안 해도 당연한 것이고, 굳이 말로 해야 하는 것은 부채의식, 정치적 신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선거라는 것은 사실 인생을 거는 것 아닌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떨어지면 사실 피폐를 넘어서 너덜너덜 해진다. 그럼에도 제가 계속 도전했던 것은 전적으로 부채의식이다. 노 대통령께서 청와대 계실 때 제가 세 번 들어가 일하지 않았나. 국정상황실 행정관, 경제수석식 행정관, 제2부속실장을 했다. 선배들은 농담으로 ‘전재수가 청와대를 공중목욕탕처럼 들락날락 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이 일부러 데려다 일을 시키셨다고 생각했다. 출마 자원으로 경력과 몸집이 생겼는데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원내선임부대표가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본보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청와대에서의 기억은. 

“참 공부를 많이 하셨다. 회의를 한 번 소집하면 2시간을 잡아놨는데 6~8시간을 하신다. 이를테면 청와대 업무혁신 프로세스를 만드는 회의인데 정보통신 기술이나, 컴퓨터, 정책 결정의 과정에 대한 것을 미리 다 공부하고 꿰고 마치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보고를 하듯이 브리핑도 하셨다. 허술한 지도자는 그럴 수 없다. 본인이 직접 다 꿰고 있고 전체 프로세스를 머리에 쥐고 있고, 학습 공부 토론하는 남다른 지도자였다. 그런 모습이 그립다.”

 -그런 리더십으로 남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이라 보나. 

“기존의 관행, 젖어있던 타성,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게 만들었다. 사회 전반에 단단하게 굳어 마치 그것이 다 인양 생각했던 것을 산산조각 낸 지도자 중 한 분이지 않을까. 선거 제도, 정치 대연정 제안, 국가 균형 발전, 지방 분권의 문제 등 인식의 지평이 넓었다. 때로는 우리끼리 ‘왜 노무현 대통령은 사람들의 반발만 앞서가지 세발, 네발 앞서가냐’는 이야기를 늘 하기도 했다.”

 -외로운 정부였다는 의미인가. 

“중앙권력, 입법부 권력, 지방정부 권력 등이 따로 있다고 보면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만 둥둥 따로 떠 있는 섬, 섬으로 갇혀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그런 형국이었다. 보수 진영으로부터도, 진보 진영으로부터도 환영 받지 못하고 박수 받지 못했던 정부였다. 권력 구조로 보더라도, 진영 논리로 보더라도 외로웠다. 실용주의를 중시하는 것도 있지만 진보 진영의 논리라고 하더라도 회의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파병, FTA 등을 하니 외로울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이 시대의 이정표였다는 것은 11년이 지나서야 우리 사회가 가는 방향을 보니 알게 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청와대가 177석 슈퍼 여당과 발맞추게 됐다. 

“아마 노 대통령이 살아계셨다면 ‘아 기분 좋다’ 이 한 말씀만 하시고는 아마 좋아하시기 보다는 엄청난 많은 주문하셨을 것 같다. 이것도 살피고 저것도 살펴라. 국가 균형발전 등도 아직 더 갈 길이 멀고, 검찰 개혁의 문제도 과거 관행이나 불문율이 많이 깨졌지만 아직 이제 시작 단계인 것도 많다.”

 -무엇은 이뤄졌고 무엇은 부족한가. 

“관념적으로는 노 대통령이 꿈꿨던 세상은 ‘사람 사는 세상’이다. 디테일한 것들이 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특히 국가 균형 발전, 지방 분권의 문제는 돌아봐야 한다. 고려부터 1,000년을 중앙집권 국가에서 살다 보니 우리의 DNA에 중앙집권주의적 사고, 서울ㆍ수도권 중심의 일극주의가 뿌리깊게 쌓여 내재화돼 있다. 지금 수도권을 제외한 나머지 지방은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은 다 빠져 나가고 산업 기반은 붕괴된다.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제가 부산 출신이라 더 절박함도 있을 것이다.”

 -21대 국회에서 진도가 나갈 수 있나. 

“20대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 헌법 개정 논의 가운데서, 여야 간 별 이견이 없이 합의되는 부분이 지방 분권의 문제였다. 이제는 많은 권한을 지방으로 넘겨줘야 한다. 도시의 인프라를 깔아야 산업, 관광객이 오는데 전부 예비타당성조사에 걸려서, 인구 수에 밀려서 수도권만 모두 통과되고 지방은 안 된다. 지방의 권한을 강화하고 창의적 에너지를 통해 그 지역 특성을 살리는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공멸할 수 있다.”

 -일각은 ‘노무현 없는 노무현 시대의 도래’를 말하고, 일각은 ‘친노, 노무현의 제자들’의 절치부심에 주목한다. 

“그건(친노) 사소한 얘기다. 전적으로 국민의 힘이다. 누가 당정청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는 부분은 사실 사소하고, 국민들의 힘으로 노무현의 꿈이 하나씩 이뤄지고 있다. 이번에 지역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감명을 받고 민주당을 지지하게 됐다는 분들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그 삶이 국민들께 와 닿는 바가 많았고,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분출돼 나오진 않았지만, 스며들고 에너지가 된 것 같다. 5월 마다 떠올릴 수 밖에 없는 노무현의 꿈,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우리가 나아가고 있다고 본다.”

 -지금 당이 되새겨야 할 노무현 정신은 뭘까. 

“177석 대승을 거뒀다. 자칫 잘못하면 오만해 질 수 있다. 그리고 헌법을 제외한 대부분의 법안 단독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힘이다. 열린우리당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 정도로는 엄청나게 부족하다. 일하는 국회를 만들어야 하고, 싸우지 말고 협치해야 하고, 다만 야당이 국민을 위한 일을 하지 않는 경우엔 국민이 주신 177석의 힘을 보여야 한다.”

 -개인적인 비전은.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시작하는 것으로 21대 국회를 시작하겠다. 원내 선임부대표가 됐는데, 일하는 국회 성과를 만들 수 있도록 원내 활동에 집중하되, 그 힘들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기회를 주신 북구 주민들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지역구의 여러 현안을 잘 챙기겠다. 새로운 계획으로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개선을 하나씩 하나씩 이뤄 나가도록 부단히 움직이는 정치인, 변함 없는 정치인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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