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정책 펼치던 유럽 지도자들
먹고 사는 문제에 비중 두느라
탄소배출 억제 인식 달라지기 시작
탈세계화ㆍ국가주의 흐름도 보여
유럽 내 남북ㆍ동서 균열도 선명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열린 유럽’의 많은 것을 바꿔 놨다. 국경은 닫혔고, 피폐해진 경제 상황 앞에 ‘나부터 살고 보자’는 자국 이기주의가 득세했다. 성장과 회복이 우선시 되면서 유럽이 세계를 향해 발신하던 ‘기후변화’ 의제 역시 자취를 감췄다. 코로나19가 초래한 유럽 ‘퇴행적 변화’의 단면이다.
18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 싱크탱크 유럽개혁센터(CER)의 찰스 그랜드 소장은 최근 기고를 통해 코로나19 이후 유럽에서 ‘친환경정책 반발(green backlashㆍ그린 백래시)’을 예측했다. 감염병 여파로 일자리를 잃거나 벌이가 적어진 많은 시민들이 환경 이슈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이 기회를 틈 타 정부에 대폭적인 규제 완화를 요구할 태세다. 이미 1분기 유로존 국내총생산(GDP)의 전 분기 대비 감소율(3.8%)은 1995년 이후 가장 큰 낙폭을 보였다. 유럽에서 모범 방역국으로 꼽히는 독일마저도 지난달 실업자 수(250만명)가 전달보다 30만명이 늘어나는 등 고용지표 역시 악화일로다.
그러자 탄소 배출 억제를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여기던 유럽 지도자들의 인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경제는 처참한 민낯을 드러내는데, 친(親)환경 정책만 고집하다간 극단주의 세력의 힘만 키워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랜드 소장은 “코로나19 이전에 스웨덴민주당(SD), 독일을위한대안(AfD) 등 극우정당은 이미 친환경 정책에 대한 적대감을 자양분 삼아 지지세력을 늘려 왔다”고 설명했다.
유럽연합(EU)은 일단 환경 우선 기조를 유지할 방침이나 험로가 예상된다. 지난달 28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EU의 코로나19 이후 (경제) 회복에 ‘그린딜’이 나침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린딜은 EU가 지난해 말 발표한 ‘2050년까지 탄소배출 제로(0)’ 목표를 둔 정책이다. 벤자민 자이처 미국기업연구소(AEI) 연구원은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화석 연료로 대표되는 ‘저렴한 에너지’가 코로나19의 경제적 충격을 극복하는 데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니 가급적 빨리, 또 일거에 경제적 손실을 만회해야 하는 각국 정부가 고비용 환경 정책에 어느 정도 호응할지는 미지수다.
코로나19 시대 유럽의 퇴보는 이 뿐이 아니다. 반(反)통합ㆍ개방 기조가 뚜렷하다. 바이러스 확산과 동시에 각자도생을 위해 빗장을 걸어 잠근 유럽의 행보는 탈(脫)세계화와 국가주의 흐름을 명확히 보여줬다. ‘브렉시트(Brexitㆍ영국의 EU 탈퇴)’를 계기로 커진 ‘하나의 유럽’에 대한 의구심이 한층 증폭된 것이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지원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선 유럽 내 남북 및 동서간 균열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불법 이민 문제와 10년 전 유로존 경제 위기 등으로 싹튼 갈등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형국이다. 대표적으로 유럽 각국이 약속한 채무 증가에 의한 기금 조성 방식은 여전히 금융위기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불만만 가중시켰다.
가디언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도래하기 전부터 조짐이 보인 부정적 요소들이 코로나19 이후 가속화하고 있다”고 평했다. 유럽이 합리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EU 해체’란 최악의 시나리오가 코로나19의 먼 미래가 될지 모를 일이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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