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징역 2년의 실형이 확정돼 복역까지 마친 한명숙 전 국무총리 뇌물 사건이 새 국면을 맞게 됐다. 한 전 총리에게 9억원의 뇌물을 줬다고 알려진 고(故) 한만호씨의 옥중 비망록이 9년 만에 공개됐다. 1,200쪽 분량의 비망록에는 검찰의 회유와 뇌물 거짓 진술 강요, 법정에서의 진술 번복 과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한 전 총리에 대한 재심과 사면 주장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 비망록에 따르면 2010년 당시 사기죄로 수감 중이던 한신건영 대표 한씨는 검찰로부터 느닷없이 “아는 정치인을 대라”는 추궁을 받았다. 한씨는 한나라당 친박계 의원 이름을 대며 뇌물을 줬다고 했으나 검찰은 이를 묵살하고 한 전 총리 관련 사실을 진술하도록 했다고 한다. 한씨가 알고 지내던 한 총리 비서 김모씨와의 돈거래가 발단이었다. 검찰은 “한 총리 유죄만 나오면 사업 재기와 조기 출소를 돕겠다”며 뇌물 진술을 제안했고, 한씨는 공포 속에서 거래에 응했다고 비망록에는 적혀 있다. 그때부터 73차례의 검찰 조사를 받았는데 진술조서 작성은 5차례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법정에서의 진술 연습이었다고 한씨는 밝혔다.
□ 하지만 재판 시작 후 심경에 변화를 일으킨 한씨는 법정에서 “뇌물을 주지 않았다”고 번복해 한 전 총리는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2심과 3심은 한 전 총리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의 주된 쟁점은 한씨가 김씨에게 빌려준 3억원의 성격이었다. 사적인 대여금인지, 정치자금인지와 한 전 총리 개입 여부였다. 특히 3억원 중 수표로 건네진 1억원이 한 전 총리 동생 전세금으로 사용된 사실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검찰과 2심 재판부는 이를 한 전 총리 뇌물의 증거로 본 반면, 변호인 측은 한만호와 김씨, 한 전 총리 동생 등 3자 사이의 금전 대차거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 분명한 것은 비망록을 통해 검찰의 강압 수사가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소수 의견을 낸 5명의 대법관도 검찰 증거 수집 과정이 수사의 정형적 형태를 벗어났다고 지적했다. 한씨는 비망록에서 검찰의 회유에 대해 “그 능멸, 모욕감은 죽어서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조서를 암기시키고 테스트한 뒤 잘하면 사식을 사준 데 대해 “검찰의 강아지가 됐다”고 자조했다. 검사장이 언론과 유착해 여권 유력 인사의 비리를 캐내려 했다는 의혹을 받는 채널A 사건과 묘한 데자뷔가 느껴진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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