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적 문체로 남성 패션지 ‘GQ’를 18년간 이끌어온 이충걸 전 GQ 편집장이 문화 현상의 이면을 새롭게 들춰 봅니다. 현재 서울 필동에 사는 이 전 편집장의 ‘멘션(mentionㆍ촌평)’은 격주 수요일자 ‘한국일보’에 실립니다. 

 <4>커피숍은 왜 이렇게 많을까 
지난해 5월 개장한 서울 성수동 미국 커피 브랜드 블루보틀 국내 1호점 앞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다. 연합뉴스

집 근처에 약속이 있어 밖에 나갈 때마다 신기한 광경을 본다. 내가 사는 데는 워낙 서울에서 오래된 동네라 유동 인구도 적은데 세 집 건너 한 집 꼴로 카페가 문을 열다니, 미스테리는 거의 폭동 같았다.

동시에 의구심도 커졌다. 홍대, 이대의 저녁과 비교하면 지구 종말처럼 따분한 거리에 저렇게 카페가 많으면, 커피 한잔에 얼마 남기는 수공업적 판매 방식으로 어떻게 손익 평형을 맞추지? 임대료며 수도세, 직원 임금은 뭘로 감당하지? 어쩌면 반만 년 이어온 한국인의 알코올 중독이 완화된다는 조짐일까? 혹시 커피의 질이며 일관성을 따지지 않는 시대 시스템에 새 질서를 만드는 중일까? 거대 브랜드의 패권에 도전하는 작은 카페를 향해 커피 복음주의자들은 무슨 충고를 할까? 그 와중에 마음 속으로 나만의 지정석을 정해둔 진실한 카페도 생겼다.

5월의 화사한 오후, 벽 3면이 유리인 실내로 쏟기는 광량(光量) 아래 심각한 일과 사소한 일을 이야기하는 여성들은 하이힐을 신고 맨해튼을 돌아다니며 테이크아웃 커피를 홀짝거리는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신 같았다. 빨대 꽂힌 종이 컵은, 커피가 ‘새로운 분주함’이라는 문화 속에서 시간에 쫓기는 화려한 사람들을 위한 음료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서 이곳까지 떠내려온 커피는 우리 상상력을 탈취해 수백 년 커피 역사를 십여 년의 일시적 유행으로 줄여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커피 유행의 변화가 가치의 변화를 말해주는 요즘, 나는 로스팅된 커피를 자기들 상표로 포장한 종이 봉투를 보며 어떤 걸 주문해야 커피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인정해줄지 고민한다. 나는 다크 로스팅을 싫어하는데, 그걸 찾는 사람들이 많은 건 독특한 탄 맛이 더 좋다고 소비자를 납득시킨 스타벅스 탓이라고 잘난 척 하면서. (게다가 스타벅스는 소비자에게 이탈리아어로 말하도록 요구하면서 라떼의 의미를 가르쳐주었지)

먼저 풍부한 초콜릿 맛에 강렬함을 보탠 콜롬비아 커피? 예상대로 적절히 달콤한 킬리만자로 커피? 시큼한 오렌지 맛이 연상되는 케냐 커피? 내전에서 회복중인 엘살바도르 커피? 손님 몇은 바리스타가 콘에 얹힌 커피 가루에 물 몇 그램을 붓자 부글거리며 일어나는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다. 커피 콩이 신선하다면 곧 부풀어 올라 작은 이산화탄소 방울을 만들 것이다. 바리스타가 나머지 물을 중심부터 바깥으로 원을 그리며 붓다가 잠시 멈추자 커피 입방체가 아래로 똑똑 떨어진다. 커피 내리는 과정에 집중하는 얼굴들은, 프로들과 연대감을 느끼려는 희망으로 측은해진 아마추어 티가 아니라 그룹 테라피가 된 커피의 오늘을 말해주는 것 같다. 모두가 머리 속에 커피에 대한 서정적인 에세이를 쓰는 사이, 소비자 선택과 속물 근성이라는 번잡함이 딸려 나온다.

곧바로 재배 농장과 토양, 가공법과 공정 무역, 원두의 상태와 그것을 운송하는 마대 자루처럼 통제할 수 없는 커피 가치가 작렬한다. 취향에 맞는 원두를 구해 직접 커피를 내리는 황홀함 뒤로 추출 방식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는다. 여기에 유럽 여행갈 때 커피 머신을 등에 지고 다녔다는 커피 광, 2박3일 놀러 갈 때도 에스프레소 메이커와 라바짜 로사 몇 팩 챙겨가는 평론가, 커피집을 일일이 다니며 기운 좋게 커피 트렌드를 비판하는 비관적 차별주의자까지 가세한다.

커피는 누구라도 매일 마신다. 그것도 지나치게 많이. 게티이미지뱅크

인생 각자 산다지만, 우리에겐 공통된 습관이 있다. 커피. 술주정뱅이도 하루는 거를 때가 있지만, 커피는 누구라도 매일 마신다. 그것도 지나치게 많이. 지갑과 최단 거리에 있는 커피 중독은 아무도 끊지 못한다. 거기에 “커피 한 잔이면 정부미가 한 말” 같은 셈법은 너무 옹색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사치가 가십용 과녁이 되지 않는 것은 오직 커피뿐이다.

호화스러움이 빛을 잃은 지금, 커피는 대중 계급의 한 부분이자 경험의 과정이 되었다. 번쩍이는 트레이에 커피와 같이 놓인 스콘은 어떤 지위를 부여한다. 우리는 종교, 정치, 사상이 아니라 브랜드화된 커피를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한다. 동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다면 바삭거리는 비닐 속 로고 찍힌 카푸치노면 충분하다. 뚜껑을 열었을 때 올라오는 흙냄새의 광풍은 커피 향이 전해주는 것 이상을 약속하니까.

나는 열살에 처음 커피를 마셨다. 커피가 양육 과정의 하나였던 때의 기억은 끝이 없고 몹시 구체적이다. 일찍 수업을 마쳐 생일처럼 특별해진 날, 밖에서 놀다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커피 가루에 우유를 타주셨다. 주전자 주둥이가 꽃무늬 새겨진 커피잔에 닿으면 반짝이는 유리를 두드리듯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찻잔에 코를 바짝 갖다 댔다. 수증기가 위로 올라가고, 확장된 콧속으로 방금 건조된 빨래처럼 달콤하고 메마른 냄새가 났다. 김이 나는 잔은 그렇게 그날 하루에 구두점을 찍었다. 나직한 오후의 색조 속에서 뜨거운 물을 잔에 따르면 그 옛날 배수구를 핑그르르 돌며 내려가던 물소리가 생각난다. 그 소리는 지금의 것일까, 그 옛날의 것일까.

십대 후반의 커피는 내성적인 사람에게 술이 그렇듯이 신이 보내준 것 같았다. 신체적 효과는 드라마틱했다. 카페인은 수면을 규제하는 아데노신이라는 화학 물질에 방벽을 쳐 어떤 날은 네 시간짜리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한 번도 졸지 않고 보았다. 커피 칸타타는 종일 울렸다. 아침엔 사발로 한 잔, 늦은 아침에는 작은 잔으로 한 잔, 열두 시가 지나면 중간 사이즈로 한 잔, 늦은 오후엔 기습적인 스키니 라떼 한 잔. 밤에도 피곤하지 않았다. 나는 모두 잠든 밤에 또렷하게 추가된 시간을 만끽했다.

어느 날 새벽 세 시에 고양이에 관해 검색하는데 뭔가 잘못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집은 반려묘를 안 기르고 어머니도 손사래 칠뿐더러 나에겐 생명 하나 기를 박애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구식의 위로를 주는 존재로 비쳐서인지 차에 함유된 카페인은 문제 된 적 없는데, 커피는 서커스의 백정 원숭이처럼 날뛰고 있었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지 못한 날이면 전두엽이 욱신거렸다. 너무 많이 마신 밤엔 우심방과 좌심실이 뒤바뀔 듯 쿵쾅거렸다. 커피는 낙천적이고 외향적인 친구 같다가 제 시간에 만나지 않으면 철 몽둥이로 현관문을 두들겨 대는 나쁜 친구로 변했다. 한편, 세상의 모든 라떼를 마시며 고지방 우유를 다량 퍼붓고 있자니 뚱뚱하고, 짜증스러우며, 영원히 카페인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미래가 펼쳐졌다.

병원 상담까지 했던 불면증은 당연히 나아지지 않았다. 화가 잔뜩 난 커피 습관을 볼모로 잡고 있는 사람은 전국에 나 뿐인 것 같았다. 나는 반감이 아니라 오직 자발적 단순함으로 며칠 커피를 끊기로 했다. 쇼핑을 그만하겠다고 맹세하는 탈퇴자 혹은 피난민처럼. 커피가 주는, 굵고 짧은 하루의 엔도르핀을 끊는 게 쉽다고 말하진 않겠다.

금단 현상은 슬슬 밀려오는 메스꺼움과 그 위에 얹힌 두통으로 시작되었다. 카페인이 주입되지 않은 사지는 척추가 빠져나간 듯 흐물거렸다. 감정이 빠르게 퇴색하고, 머리는 사악한 어두움에 갇혔다. 커피가 몸과 마음에 침입했을 때를 묘사하는 용어가 혹시 따로 있을까? 두통은 일주일이나 지속되다가 이윽고 수그러들었다. 아데노신이 다시 움직여 잠도 잘 수 있었다. 대신 인생이 이상하게 밋밋해졌다. 커피 맛이 그리워 소심하게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면 이빨 없는 강아지가 무는 것 같았다. 커피 향이 나지 않는 어느 저녁엔 그 상태가 나에게 해롭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몹시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증상은 재빠르게 플랫 화이트로 고칠 수 있었지만 한동안 참았다. 이 이야기를 수학 교사 친구에게 했더니 그녀는 자기 남편도 커피 두통에 시달리다가 얼마 전에 응급 해결책을 찾았다고 했다. 싱글 에스프레소 샷에 곁들인 초콜릿 케이크.

동네 커피 집이 늘어나는 것은 커피가 삶의 배경 음악이 됐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나도 결국 라떼를 찾았다. 커피의 고귀한 결정체인 에스프레소와, 설탕 대신 스팀을 쏘여 달콤해진 우유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라떼 한 잔을. 좌절된 마음으로 에스프레소를 들이키자 흙냄새 나는 달콤함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미뢰 위에 어떤 존재가 오래 남았다. 한 마디로 나는 커피 공화국의 치세 아래 초콜릿 덮인 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 생각에 커피는 모두 가정과 관련된 것이다. 커피로부터 멀어지려는 열망과 커피로 되돌아가려는 갈망 때문에 괴롭다고 해도 이 둘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확실히 커피 농장을 탁자로 데려오는 일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어떤 풍자 같다. 나는 악마의 음료를 끊을 수 없었다. 끊을 자신은 처음부터 없었다. 커피는 낯선 이를 맞는 서양식 접대의 상징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이며 생존이니까. 커피 없는 하루는 지루하고, 섹시하지 않으며, 마무리가 덜 되었으니까.

커피 레서피가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에 나올법한 모든 단어를 끌어다 쓸 만큼 엄청난 시절에 커피에 관한 장광설을 모두 벗겨 내자 유용한 환상이 남았다. 커피는 매일 마셔도 읽지 않은 책 같은 기대를 준다는. 결국 나는 알게 되었다. 동네 커피 집이 이렇게 늘어난 것은 커피가 삶의 배경 음악이 된 나 같은 사람 때문이란 걸.

에세이스트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