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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사색] 시민 목숨, 노동자 목숨

입력
2020.05.17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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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역성공에도 생산현장 ‘국가의 부재’ 여전

매년 공장에서 세월호참사의 7배가 죽어가

노회찬 마지막꿈 중대재해처벌법 제정해야

대형 화재가 발생한 경기 이천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인근에 지난달 30일 마련된 유가족 대기 장소에서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대형 화재가 발생한 경기 이천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인근에 지난달 30일 마련된 유가족 대기 장소에서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역사의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은 두 번 반복한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나폴레옹 흉내를 내며 프랑스 정치를 능멸한 그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의 황제 등극을 바라보며 카를 마르크스가 쓴 유명한 구절이다. 한국현대사에서도 박정희가 ‘비극’이었다면,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보여주듯이 박근혜는 ‘희극’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국정파탄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준 세월호 참사는 희극이라기에는 너무 처참한 비극이었다. 특히 비극적인 것은 수학여행길에 오른 학생들과 시민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이들의 생명을 지켜줘야 할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국가의 부재’이다.

304명이 목숨을 잃은 세월호가 6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또 다른 재난을 겪고 있다. 그 결과 벌써 26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세월호와 달리 코로나19는 글로벌한 재난이며, 그 대처에 있어서도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모범 사례로 주목을 받고 있다. 물론 모범적인 대처가 문재인 정부의 공만은 결코 아니며 여러 복합적인 요인의 결과지만, 확실한 것은 이번 대처에 있어서 세월호 같은 ‘국가의 부재’를 느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역시 촛불은 헛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 역시 반쪽 이야기일 따름이다. 세계가 우리의 방역을 칭송하고 문재인 정부가 이를 자랑하고 있을 때, 이천의 물류창고 건설 현장에서 대형 사고가 일어나 38명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가족의 생계를 벌기 위해 건설 현장에 나왔다가 화염에 타 죽어 간 이들 노동자에게 안전을 지켜 줄 국가는 여전히 없었다.

보수세력은 대한민국은 신생국 중 유일하게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라고 자랑한다. 맞다. 한국은 유일하지는 않지만 대만과 함께 신생국 중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모두 이룬 ‘유이국’이다. 그러나 경제발전 뒤에는 자살률 세계 1위, 청소년 행복지수 최하위 등 그림자도 엄청나다. 특히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노동시간 1위에다가 산업재해사망률도 줄곧 세계 1위를 차지해 왔다. 일하다 죽을 확률이 제일 높은 나라가 바로 우리다. 문재인 정부하인 2018년에도 2,142명이 생산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1년에 세월호 희생자의 7배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코로나19 희생자의 8배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죽어나가고 있다. 이천 현장 등 우리의 생산 현장은 ‘땅위의 세월호’이며 매년 현장에서 세월호참사가 7건씩 일어나고 있다. 노동자들을 단순히 이윤의 수단으로 생각하며 이들의 안전을 경시하는 기업문화와 정부의 태도가 이 같은 부끄러운 기록을 만들어 온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소위 ‘민주정부’ 들어서도 산업재해는 크게 줄어든 것 같지 않고 ‘민주정부’들이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한 정책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니 이를 넘어서 시민들도 동료 시민들의 목숨은 중히 여기고 이들의 부당한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슬퍼하면서도 작업장에서 죽어 간 노동자들의 목숨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들의 죽음에는 그리 분노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두 달 뒤면 정의당 노회찬 의원의 2주기다. 노 의원은 촛불 승리 직후인 2017년 4월 노동자들의 안전을 경시하는 우리의 기업과 정부를 근본적으로 개혁해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 중대 산업재해에 책임이 있는 기업과 정부 책임자를 처벌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은 얼마 뒤 소관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됐지만 3년째 계류중이며, 이달 말 20대 국회가 종료하면 자동 폐기된다. 얼마 전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김용균씨가 희생된 뒤 ‘김용균법’으로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할 때도 이 부분은 빠졌고, 이번 사고를 계기로 정부가 건설 안전을 총괄하는 특별법을 만들겠다고 나서면서도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노동자의 목숨은 시민의 목숨과 다른, 하찮은 것인가? 다른 건 몰라도, 출근했다 시체로 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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