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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 구걸하겠는가” 재조명 받는 이해찬ㆍ설훈의 5ㆍ18 법정 최후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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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 구걸하겠는가” 재조명 받는 이해찬ㆍ설훈의 5ㆍ18 법정 최후진술

입력
2020.05.14 20:00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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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도서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연루 민주 인사들 최후진술 공개 

 20대 시절 이해찬 대표, 설훈 의원 군사 법정에 서 신군부ㆍ독재 비판 

1980년 8월14일 내란음모죄 등으로 구속기소된 김대중 전 대통령 등 24명에 대한 첫 공판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 8월14일 내란음모죄 등으로 구속기소된 김대중 전 대통령 등 24명에 대한 첫 공판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광주에서) 가슴 아프게 무수한 사람이 죽어갔다. 그런데 구차하게 징역을 구걸하겠는가.” (1980년 9월 12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목숨 바칠 각오를 했다.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갔는가. 이 눈물은 그 사람들에게 보내져야 한다.”(같은 날 설훈 민주당 의원)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강탈하기 위해 조작한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됐던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40년 전 발언이 공개됐다. 서슬 퍼런 신군부 앞에서도 굽히지 않았던 결기가 다시 조명되고 있다. 김대중도서관이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두고 1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 수필, 이해찬ㆍ설훈 등 재판에 넘겨진 23명의 최후진술 내용을 공개하면서다.

80년 9월 12일 열린 군사재판은 김 전 대통령을 제외한 다른 인사들의 최후진술 자리였다. 당시 28세였던 이해찬 대표의 첫 마디는 “시퍼렇게 젊은 놈이 여태 살아 있어 죄송하다”는 말이었다. 서울대 복학생협의회장이었던 이 대표에겐 ‘북한의 사주를 받아 5ㆍ18을 일으켰다’며 내란음모 혐의가 적용됐다. 이 대표는 5ㆍ18을 언급하며 “가슴 아프게 무수한 사람이 죽어갔다. 그런데 구차하게 이 자리에서 징역을 구걸하겠는가”라며 담담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히기 시작했다.

군사 독재정권 비판도 이어졌다. 그는 “최근 옥중에서 1958년 진보당사건의 조봉암 외 21명의 피고인에 대한 재판 내용을 읽었다”며 “1심에서 유병진 판사가 조봉암과 다른 1명은 징역 5년으로, 나머지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 때 반공청년단이 판사를 살해하려 위협했고, 결국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재판을 받으며 그 때와의 유사점을 발견한다. 한 정권의 유지를 위해 합법을 가장해 정적을 살해하려고 하고 있는 점”이라고 신군부를 꼬집었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문제도 짚었다. 이 대표는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이런 불상사는 시정이 될 것이다. 구차하게 징역을 구걸하지 않겠다. 민중적 지혜의 힘에 감사드린다”고 최후 진술을 끝맺었다.

당시 27세였던 고려대 학생운동권 출신 설훈 의원의 최후 진술은 고함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는 “도대체 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현재 나가고 있는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설 의원은 “지금 몇몇 분들이 눈물을 보이셨는데 고문 당한 걸 가지고 눈물을 흘려선 안 된다”며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는가. 이 눈물은 그 사람들에게 보내져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신군부 비판도 잊지 않았다. 그는 “군대에 총을 줄 때는 국민을, 국가를 지키라는 것이지 국민을 죽이라고 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계엄군은 시민을 패고, 밟고,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았다”며 “이 난국을 수습하는 길은 군은 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 정치는 정치인에 맡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함께 재판을 받았던 한승헌 변호사는 저서 ‘재판으로 본 현대사’에서 “(설 의원) 발언에 당시 법정 안은 얼음처럼 차갑고 숙연해졌다”고 회상했다.

김대중도서관이 이날 공개한 최후 진술 내용은 당시 재판을 방청한 민주 인사들의 가족들이 내용을 외워 재판이 끝난 뒤 글로 작성한 것이다. 함께 기소된 문익환 목사의 아들 문의근, 문성근씨가 주로 글을 작성했다.

김 전 대통령의 옥중수필도 공개됐다. 80년 9월 17일부터 81년 1월 23일까지 사형수 신분으로 수감돼 있으면서 작성한 14편의 글이다. 김 전 대통령은 “나는 박정희 정권 아래서 가장 가혹한 박해를 받은 사람이지만, 나에 대한 모든 악을 행한 사람들을 사랑과 용서의 뜻에 따라 일체 용서할 것을 선언했다”(80년 12월 3일)고 적었다. 사형수 신분이면서도 친필로 용서와 화해를 강조한 것이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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