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여파로 졸업식과 입학식도 치르지 못하고 원격수업으로 겨우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그 사이 두툼한 외투는 반소매로 바뀌었다. 아이들이 없는 교정에 피어나던 봄꽃들도 지고 어느새 여름꽃으로 돋아날 채비를 한다. 이렇게 속절없는 학교의 하루가 반복되는 상황에도 스승의날은 또 돌아왔다. 교사로 스무 해를 넘게 살아오며 참 부담스러운 날이었는데 아이들이 등교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맞는 올해의 스승의날은 묘한 감정이 교차한다. 부담스러운 날을 피해서 좋기는 한데 이렇게 기념하는 스승의날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더해진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며칠 전 교육부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스승의날을 맞아 교육부장관이 교원단체 대표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싶으니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여느 해와는 달리 스승의 정부기념식이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자들도 전화가 와서 올해 스승의날 학교 풍경을 묻는다. 코로나 시국에도 스승의날은 이렇게 연례행사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교사인 나는 스승의날만 되면 이런 불편한 초대와 질문을 받는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질문은 계속될까?
돌아보면 내가 스승의날을 이렇게 부담스럽게 느끼기 시작한 것은 교사가 되면서부터다. 초임 발령을 받았을 때 아이들 더벅머리를 다듬어주기 위해 군대에서 배운 이발 실력을 발휘한 적이 있다. 한 선생님이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사진전에 응모했는데 덜컥 입선을 하면서 스승의 날 미담사례를 찾는 기자들이 학교를 찾게 되었다. 교육청에서 교육감 표창장을 줄 테니 공적조서를 써서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다. 교사에게 주는 상은 상을 받고 싶은 사람이 빽빽하게 자신의 공적을 적어서 내야만 준다는 것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주는 상도 이렇게 하지 않는데 참 부끄러운 교단의 현실이다.
이후 내가 교단에서 겪은 스승의날은 교사들의 미담과 험담이 공개적으로 오가는 날이었다. 미담이야 축하해 주고 내가 부족한 점은 본받으면 될 일이었지만 험담은 도를 넘는 것들도 많았다. 심지어 지상파 방송에서 스승의날을 맞아 ‘내가 겪은 최악의 스승은’이라는 앙케트를 진행한 적도 있으니 말이다. 이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털어내고 교사로 소신껏 살아가고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렸었다. 스승의날을 폐지하거나 폐지가 어렵다면 이름이라도 ‘교육의 날’로 바꾸어 달라고 했다. 스승의날을 맞아 기삿거리가 필요한 언론은 그 소식을 뜨겁게 다루었지만 변한 건 하나도 없이 오늘 다시 이렇게 스승의날을 맞는다.
작년까지만 해도 교육부에서 스승의날 정부기념식장에 내빈으로 와달라는 요청을 했을 때는 수업을 빠질 수 없어서 못 간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간다고 했다. 원격수업 상황을 점검하고 등교수업과 관련한 현장의 의견을 청취하는 자리라고 하니 못 갈 이유가 없었다. 아니 꼭 가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기자들의 질문에는 원격수업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등교시점까지 오락가락하면서 더 무거운 날이니 조용히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지금껏 교사로 살아오며 한 번도 내가 스승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다. 스승은 “자신을 가르쳐 이끌어주는 사람”인데 그 자격은 내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은 사람, 이끌림을 받은 사람이 부여하는 것이지 어찌 내가 스승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수요자와 공급자로 나누어 입시가 교육의 전부인 양 하다가 하루 반짝 스승이라며 찾는 것도 어설프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스승이 아니라 교육이다. 하루의 스승이 아니라 일상의 교사로 소신껏 교육하고 싶다. 오늘 같은 날이면 교육당사자들이 하루 만이라도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날이면 좋겠다. 그러자면 말부터 바꾸자. 스승의날이 아니라 교육의 날이다.
정성식 실천교육교사모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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