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막바지, 김인영 작가의 작품 ‘매끄러운 막’은 하나의 화두를 던진다. 무한복제가 가능한 시대인 21세기, 판화란 무엇인가.
여러 색깔 염을 들인 듯한 김 작가의 작품은 투명 아크릴판 위에 손으로 베껴 넣는 판화 기법인 ‘수전사’와 스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복제물을 뒤흔들어 변형과 왜곡을 만드는 ‘스캐노그라피(scanography)’ 기법을 사용했다. 판화라면 만들어진 그대로 반복적으로 찍어 내는 것일 텐데, 마블링 같은 색과 형태를 띠고 있는 김 작가의 작품은 반복이나 복제가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면 이걸 판화라 부를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강동주 작가의 ‘커튼’은 또 어떤가. 작가는 자신이 넉 달 동안 미국 뉴욕에 머물면서 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밤의 풍경을 그린 드로잉을 판화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한 판화는 모두 61장. 매일 밤 똑같은 곳에 앉아 똑같은 밤의 풍경을 그렸지만, 예상대로 그 밤의 풍경은 매일 밤 미묘하게 달라졌고, 그렇기에 이 61장의 판화에서 매일매일 바뀌는 ‘시간’과 ‘움직임’이 담겼다. 복제와 반복이 미덕인 판화를 넘어서고자 하는 일종의 도전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국현) 과천관은 14일부터 석 달간 이례적으로 ‘판화, 판화, 판화’전을 연다. ‘이례적’이란 표현이 충분하게도 판화전은 국현에서만도 13년 만의 전시다.
진본 작품 하나가 가진 아우라를 중시하는 미술시장에서 판화는 1970~80년대 각광을 받았다. 민중예술의 시대, 싼값에 무한복제가 가능하다는 매체상의 특성이 주목받고 대접받은 덕택이다. 바로 그래서 판화는 곧 힘을 잃었다.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민중예술의 시대는 차츰 저물었고, 뒤이은 디지털 시대는 꼭 판화가 아니어도 무한 복제가 가능한 시대를 열어젖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눈여겨볼 것은 전시 제목이다. 한글로는 ‘판화, 판화, 판화’지만 영문으론 ‘Prints, Printmaking, Graphic Art’다. 예전 단순 판화를 넘어서 컴퓨터와도 융합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작명이다. 국현 관계자는 “소외 장르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거기에 걸맞게 전시장은 ‘책방’ ‘거리’ ‘작업실’ ‘플랫폼’ 4가지가 순서대로 나열됐고, 그에 따라 판화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전체적 흐름을 잡아 주겠다는 전시인 만큼, 전시 후반부의 도전적 작업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눈에 익숙한 건 전시 초중반부의 작품들이다. 전시의 출발점에 놓인 한국 추상 목판의 대표자 김상구 원로 작가의 ‘No. 895(파란새)’와 ‘No. 820(산죽)’이 그렇다. 50여년간 목판 그 자체에만 집중해 온 작가의 관록이 돋보인다. 모호한 대상이 아닌 친근한 동식물이 반복적으로 찍힌 무늬처럼 나타나는 게 정겹다.
1980년대의 작품 경향을 대표하는 오윤 작가의 ‘도깨비’, 홍선웅 작가의 ‘제주 4ㆍ3 진혼가’ 같은 작품들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작가 60여명의 100여점 작품이 내걸렸다. 코로나19 사태로 온라인 사전 예약한 뒤 관람할 수 있다.
임수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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