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사랑 얘기도 어떤 건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고, 어떤 건 삼류소설로 떨어진다. 정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같은 이슈로 정치 행위를 해도 어떤 정치인은 일류 드라마를 펼쳐내고, 다른 이는 삼류 난장판을 만들어버린다. 트럼프 대통령 들어 ‘위대한 미국’의 광휘는 크게 퇴색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본받을 점이 많은 나라라는 생각을 접은 적은 없다. 군살만 뒤룩뒤룩한 멍청한 중년 같은 나라로 전락했나 싶을 때마다, 미국은 심연의 묵직한 저력을 드러내곤 했다.
▦ 2000년 대선에서 미국 정치와 민주주의는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조지 W. 부시 당시 텍사스 주지사가 공화당 후보로 나서고,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이 민주당 후보가 되어 맞붙은 선거였다. 미국 대선은 각 주별 선거를 통해 전체 538명의 선거인단을 뽑는데, 주별로 최다 득표 정당이 선거인단을 모두 가져가는 승자독식제다. 당시 플로리다주를 빼고 두 후보가 각각 확보한 선건인단 수는 고어가 267명, 부시가 246명으로 21명 차이였다. 선거인단 수가 25명인 플로리다 선거에 대선 승패가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 개표 결과 총투표자수 약 600만명에, 불과 900~1,700표 차로 부시가 이겨 대통령에 당선되게 됐다. 그러자 고어 캠프 쪽에서 개표 결과에 불복해 엄청난 양의 무효표에 대한 재검표를 요구하고 나섰다. 팜비치 한 선거구에서만 1만3,000여표가 무효 처리됐고, 일부 민주당 우세 지역에서는 백인 경찰이 흑인들의 투표를 방해했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부시의 동생인 잽 부시가 플로리다 주지사였던 점도 의혹을 증폭시켰다. 실제 일부 선거구에서만 재검표가 진행됐음에도 표차가 단숨에 300여표로 줄어들었다.
▦ 다급해진 부시 캠프에선 연방대법원에 재검표 중단을 제소했고, 대법원은 뜻밖에 재검표 중단 판결을 내렸다. 정치ㆍ사회적 갈등이 폭발할 위기였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전개됐다. 고어가 대법원 판결을 전격 수용하면서 “나와 함께 했던 지지자들에게 이제는 새 대통령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를 당부합니다. 그게 미국입니다”라고 했다. 난장판 속에서 미국의 저력을 드러낸 명연설이었다. 민경욱 미래통합당 의원이 최근 출처 불명 투표용지 몇 장을 들고 연일 총선 부정선거론을 펴고 있다. 고어의 경우에 비해 안쓰러울 정도로 격이 낮은 삼류극장처럼 느껴진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