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윤호근 전 국립오페라단장의 심정은 ‘다장조(C major)’다. 샵(#)이나 플랫(♭) 하나 붙지 않은 다장조가 순결함과 새출발을 상징하듯, 가장 깔끔하게 비어 있는 하얀 종이와도 같은 마음이란 뜻이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3월 단장직을 내려놓은 그는 17일 오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무대에서 서울튜티챔버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오케스트라는 마침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베토벤 교향곡 1번을, 다장조인 이 곡을 택했다. 윤 전 단장 개인적으론 2년반 만에 지휘자로 복귀하는 무대다.
지난 13일 만난 윤 전 단장은 베토벤 교향곡 1번을 두고 “지휘자라면 가장 먼저 배우는 작품 중 하나”라며 “더 화려한 작품도 있지만, 새로운 시작을 하는 내겐 성스러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원래는 지난 3월 자신의 피아노 연주에 첼로, 바이올린을 합친 트리오 형식으로 연주할 계획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발목을 잡았다.
베토벤 교향곡 1번 외 이번에 초연되는 창작곡도 있다. 정승재 상명대 교수가 만든 ‘베트와 호벤(Beet&Hoven)’. 베토벤의 알파벳 B, E, H를 음표 높이로 치환해 테마를 만들고, 베토벤이 즐겨 쓰던 소나타 형식을 활용했다. 윤 전 단장은 “지난 1일에 악보를 받은 따끈따끈한 곡”이라며 부푼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탄생 250주년이 아니어도 베토벤은 윤 전 단장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그는 “베토벤이 가장 고민했던 작품 중 하나가 오페라 ‘피델리오’”라며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주인공이 결국 정의를 구현한다는 이야기인데, 인간이 인간을 구속할 수 없다는 얘기가 음악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말했다. 다장조로 스스로를 조율해온 마음 한 켠이 드러나는 얘기다.
2018년 2월 오페라단장으로 부임한 윤 전 단장은 채용비리 의혹을 이유로 자신을 해임한 문화체육관광부와 소송전을 벌였다. 문체부는 곧바로 후임 단장을 임명했으나, 윤 전 단장은 지난 3월 해임이 부당하다는 승소 판결을 받았다. 오페라단은 졸지에 ‘한 지붕 두 단장’ 상황이 됐으나, 명예를 회복한 윤 전 단장이 자진사퇴하고 문체부도 항소를 포기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윤 전 단장은 담담했다. “법원 판결에 따라 출근하지 않으면 결근 처리가 되니까 출근했을 뿐, 후임 단장이 임명된 시점부터 오페라단 업무엔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고 말했다. 오페라단에 서운함이 없다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윤 전 단장은 좋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쓴다. 지난해 9월 무대에 올린 ‘1945’는 “조선과 일본의 위안부 이야기를 통해 인류애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지금도 뿌듯한 작품이다. 3ㆍ1운동 100주년 기념작이었던 ‘윌리엄 텔’도 세계적 맥락 아래 우리 역사를 돌아볼 수 있었던 시도였다.
이제 지휘자로 돌아온 그는 “한국 음악의 정체성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독일 유학파인 윤 전 단장은 프랑크푸르트극장의 지휘자, 베를린 슈타츠오퍼 부지휘자 등 20여년간 독일 음악계에 몸 담았다. 그런 그가 3년 전 귀국을 결심한 것도 한국 고유의 음악을 하기 위해서였다.
“독일인 음악 동료들에게 작곡가 윤이상에 대한 질문을 받곤 했는데, 정작 저는 그 분의 음악에 대해 잘 몰랐어요. 나중에서야 동양철학과 한국 전통음악에 기반한 윤이상 음악의 가치를 알게 됐죠.” 국내 작곡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한국 음악을 고민하고, 그 결과물을 독일을 통해 유럽에 소개하고 싶다.
17일 무대는 그 출발점이다. 코로나19로 잔뜩 움츠러든 이 시대에 다장조의 마음을 공유하고 싶다. “소송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었습니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사람이 왜 겸손해야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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