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재난지원금의 원형은 기본소득이다. 국민의 기본생활 보장을 위해서 국가가 저소득층에게 상시적으로 지급하는 현금을 말한다. 그 아이디어는 500년 전 토머스 무어가 ‘유토피아’에서 처음 꺼냈다. 하지만 워낙 폭발성이 강한 주제라서 어느 나라에서든 그것을 도입하려는 순간 디스토피아가 되기 쉽다.
18세기 말 영국의 윌리엄 피트 수상이 기본소득을 도입하려고 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노동인구의 보호와 확대가 필요하다고 보고 ‘빈민구제법’을 추진했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토머스 맬서스가 ‘인구론(1798년)’을 통해서 폭발적 인구 증가가 가져 올 암울한 미래를 경고한 것이다. 노동인구의 확대는커녕 억제가 답이라는 말이었다. 그 책을 읽은 피트 수상은 빈민구제법을 깨끗이 포기했다.
맬서스 자신은 농담을 잘하는, 아주 쾌활한 사람이었다. 자식을 셋이나 두어 인구 증가에도 기여했다. 그래도 그의 책을 읽은 독자들은, 등골이 오싹한 저주스러운 예언 때문에 그를 굉장히 혐오했다. 맬서스 자신도 그것을 예상하고 초판을 익명으로 발행했을 정도다.
당시 맬서스를 비판하던 사람 중에는 데이비드 리카도도 있었다. 리카도는 출신 성분부터 맬서스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맬서스는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경제학 교수’라는 직함을 최초로 가졌던 사람이다. 반면, 리카도는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정식 교육도 받지 못했다. 열네 살 때 아버지 직장에 뛰어들어 유대인 주식중개인 틈에서 실전을 통해 투자 기법을 익혔다. 타고난 천재성에 힘입어 20대 초반에 큰돈을 벌었다. 그 후 빈둥거리며 놀다가 우연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고, 27세 때부터 경제학을 독학했다.
강단학자 맬서스와 재야학자 리카도는 여러 문제에서 대립했다. 그들이 평생을 두고 다툰 주제의 하나가 공황이었다. 타고난 비관론자인 맬서스는 언젠가 공황(공급 과잉)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리카도는, 공급은 항상 수요와 일치한다면서 맬서스의 주장을 비웃었다.
어느 날 맬서스가 앙숙 리카도에게 편지를 썼다. 한번 만나서 이야기나 나눠 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의외로 금방 친구가 되었다. 출신 성분과 생각은 달랐지만, 치열한 토론 과정에서 서로 얻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돈 많은 리카도는 죽을 때 세 명에게 유산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맬서스였다. 맬서스는 눈을 감을 때 “가족을 빼고 내 일생에서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은 없었다”며 리카도를 그리워했다. 두 사람의 끝없는 논쟁과 우정은 경제학계의 전설이다.
비슷한 미담은 동양에도 많다.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은 관포지교(管鮑之交)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사람인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이다. 관중은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고 말했다.
포숙아가 관중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었다. 두 사람이 동업할 때 관중이 이익을 속였지만, 눈감아주었다. 관중이 노모를 모셔서 돈이 더 필요하다며 오히려 두둔했다. 이후 두 사람은 정치에 뜻을 두고 각기 다른 정파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관중의 정파가 반역에 연루되고 관중은 사형당할 위기에 놓였다. 그때 포숙아가 “나라가 잘 되려면 관중을 중용해야 한다”며 그를 변호했다. 간신히 살아난 관중은 훗날 재상에 올랐다.
동서양의 두 우정은 동업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시기적으로는 정치적 격동기였다. 관중과 포숙아의 춘추시대는 물론이고, 맬서스와 리카도의 시대도 그랬다.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하던 격동기였다(리카도는 그 혼란을 틈타 투기로 큰돈을 벌었다).
정치적 격동을 말하자면, 우리나라 현대사도 만만치 않다. 특히 5월은 여러 가지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5ㆍ16, 5ㆍ18이 연이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것도 5월 10일이다.
오늘(5월 14일)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가 기각된 날이다.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 문재인 대통령(전 민정수석)은 네팔에 있었다. 변호사사무실 동업자이자 친구인 현직 대통령을 변호하기 위해서 급거 귀국했다. 자원방래 노문지교(自遠方來 盧文之交)가 방어한 탄핵 심판은 2004년 5월 14일 기각으로 끝났다.
탄핵 심판이 한참 진행되던 무렵 치러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민심은 헌법재판소보다 판단이 더 빨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4년 뒤 여야가 다시 뒤집어졌다. 민심은 바다처럼 변덕이 심하여 배를 띄우기도, 뒤집기도 한다(水能載舟 亦能覆舟). 그러니 선거 한 번에 흥분도, 좌절도 금물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이 진행될 때 필자는 청와대정책실 행정관이었다. 탄핵 사유의 하나인 ‘경제 파탄’의 변론 자료 작성을 맡았다. 역사의 한 모퉁이에서 밤을 새워 변론 자료를 만들 때 마음먹은 것이 있었다. 먼 훗날, 정치적 격동기에 꽃핀 동업자들의 우정에 관한, 바로 이 글을 쓰는 것이었다. 며칠 있으면 노 대통령의 기일(5월 23일)이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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