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창우 민간응급구조(EMS) 운전자 가족
민간응급구조(EMS) 운전자로 일하는 남창우(44)씨는 2달 넘게 외박을 했다. 2월19일 대구의료원 원내 확진자와 신천지 신자 등의 이송을 맡으면서 사무실에서 지냈다. 같이 일하는 동료 직원 16명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에게 바이러스가 옮길까봐 스스로 격리 조치를 취한 셈이었다. 31번 확진자가 나온 일주일 뒤부터 이송자 명단이 30명씩 배당됐고, 하루에 확진자 이송만 11명을 한 적도 있었다. 아내 정수정(41)씨는 “확진자가 쏟아질 때는 눈만 뜨면 뉴스를 확인했고 그때마다 너무 겁이 나서 눈물이 쏟아졌다”고 고백했다.
걱정도 되고 그립기도 했지만, 근무 중에는 전화를 못 했다. 전화를 받으려고 수화기를 뺨에 갖다 대다가 손에 묻어있던 바이러스가 호흡기로 빨려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감한 후 샤워까지 끝나는 시간에 전화를 걸어서 안부를 확인했다.
“남편이 고혈압이 있어요. 혹시라도 코로나19에 걸리면 위험해질 텐데, 하는 생각이 하루라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어요.”
이번 사태가 터진 뒤로 거의 매일 저녁 맥주에 의지해 잠을 청했다. 평소에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며칠 동안 하얗게 밤을 지샌 뒤로 어쩔 수 없이 술을 찾았다.
주변에서도 걱정이 많았다. 대구에 첫 확진자가 나온 날 서울에 사는 언니가 “애들 데리고 당장 올라오라”고 했다. 남편만 홀로 둘 수 없어 대구에 남기로 했다. 기사에 ‘대구 봉쇄’란 단어가 뜨면 자신도 모르게 복장을 쳤고, 차를 타고 가다가 ‘위대한 도시 대구’ 혹은 ‘대구가 이겨야 대한민국이 이긴다’ 등의 현수막 문구를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일선에서 가장 고생하는 남편이 졸지에 ‘불가촉천민’ 처지가 된 것이었다.
“한번은 제복을 입고 기사 식당에 들어갔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옆 테이블에서 밥을 먹던 사람이 식판을 들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더래요.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면 앞에 섰던 사람이 계단으로 올라가버리고요. 그 사람들도 너무 무섭겠죠.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더 가슴이 찢어지더군요.”
2월25일이 아들의 생일이었다. 남편은 혹시나 엘리베이터에서 사람과 마주칠까봐 새벽에 아파트를 방문해 현관문 고리에 마른미역과 케익을 문에 걸어 놓았다. 빨래도 그렇게 집에 전달했다.
남편의 부재가 한 달을 넘겼을 즈음 아들이 진지하게 고민 상담을 했다. “처음엔 아빠가 안 오니까 너무 허전했는데, 이제는 아빠가 오면 어색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정씨는 “1달 동안 쌓인 서먹함도 1시간이면 없어질 것”이라면서 아들에게 손편지를 써보라고 권했다.
4월10일 확진자가 ‘0’을 기록한 날 또 하염없이 울었다. 정씨는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줄 몰랐다”면서 “코로나19가 많은 이들에게 일상의 소중함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씨는 “의료진과 환자를 실어 나른 구급 대원 모두 수고하고 애썼지만 집에서 마음 졸이며 기다린 가족들의 고통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라면서 “힘든 시간을 통해 일상의 행복을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씨는 “매일 저녁 남편이 퇴근 후에 집에 들어오는 일상이 그토록 간절한 그리움이 될 줄 몰랐다”면서 “코로나19의 최전선에서 수고한 분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기록해서 기념비라도 세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김광원 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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