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여성’만을 여성주의 대상으로 삼는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
코로나 사태로 개인의 생존과 욕구의 필요가 커지며 이런 추세 더해
여성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살아가는 ‘뉴 노멀’ 필요해
‘코로나19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명제 앞에서 페미니즘도 예외가 아니다. 구로콜센터 집단감염이 보여줬듯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방역에 취약한 여성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이 드러났고, 젠더 간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같은 시기 국내에서는 디지털 성착취 범죄의 실상이 텔레그램 ‘n번방’ 사태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한국일보는 신종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한국 사회가 맞이한 위기와 전환의 시기를 페미니즘 시각에서 살펴보기 위해 다섯 명의 국내 대표적인 페미니즘 연구자들의 글을 연재한다.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와 팬데믹 주기가 짧아진다는 데 이견은 없는 듯하다. 신종 코로나 확산사태의 근본 원인은 개발 지상주의로 인해 파괴된 지구의 메시지다. ‘포스트 코로나’는 경고를 넘어 삶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뉴 노멀’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할까. 페미니즘은 뉴 노멀을 사유하는데 필수적이지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포스트 코로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오늘날 한국사회의 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 시대와 떨어뜨려 존재할 수 없게 됐다. 남녀 모두 실업이 불가피해지면서, 여성은 고용 불안 상태의 남성과 결혼 대신 경제적 독립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반려동물과 살기 시작했다. ‘생계부양자 남성’은 원래부터 현실이 아니라 신화였지만, 실업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여성의 ‘취집(취업으로서 결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여성에게도 노동자로서, 개인으로서 지위를 허락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약자에게 더 큰 타격을 준 신종 코로나 사태 이후 더 두드러지고 있다.
저출산 역시 고용의 문제임을 잊어선 안 된다. 지난해 한국의 출산율은 0.92. 정규직 공무원이 많이 거주하는 세종시의 혼인율이 전국 17개 시ㆍ도 가운데 가장 높다. 성차별은 개인이었던 여성이 가족 제도에 들어서면서 시민으로서 ‘권리’보다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 ‘도리’가 강조되면서 본격화된다. 여성의 성역할 규범은 노동, 안전, 법 제도 등 모든 측면에서 시민권을 박탈하는 근거가 된다.
‘페미니즘의 대중화’는 부정할 수 없는 추세이다. 이는 여성운동의 성취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신자유주의의 ‘긍정적’ 여파라고 할 수 있다. 여성운동사를 돌아보면, 여성의 고용률이 높아진 시기는 여성운동이 활발했을 때가 아니라 전쟁으로 남성 노동자가 대거 징집됐을 때였다. 그들의 빈자리를 여성이 대체한 것이다. 여성의 지위 변화는 여성운동의 성과이지만, 남성들 사이의 분열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는 여성운동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뜻이 아니라 그 만큼 남성이 독점적으로 사회 구조(social division)를 쥐고 있다는 의미다. 이 또한 신종 코로나를 겪는 신자유주의 사회 속에서 자주 재연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여성주의의 대중화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노무현 정부의 성격 중 하나였던 ‘좌파 신자유주의’처럼 모순된 말이지만, 정확한 묘사이기도 하다. 이제 이런 용어는 모순이 아니라 사유해야 할 복잡한 현실이 됐다. 2000년 이전 여성운동의 주된 내용은 성차별의 가시화와 아내폭력, 성매매, 성폭력, 인신매매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의 법제화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시 여성주의자들은 페미니스트로서 정체성을 주장하기보다는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여성’ 혹은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남성 사회로부터 페미니스트라고 공격받았다. 이러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페미니즘이 이슈화하는 여러 주제들에 공감하고 지지하지만, 페미니스트로 규정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양가감정을 드러내는 대표적 문구인, 그 유명한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담론이다.
그러나 당시보다 신자유주의 색채가 진해지면서 많은 여성은 이제 자신이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주의자라고 생각하게 됐다. 신자유주의는 가부장제를 변형시켰다. 계급과 나이, 국적 등 여성 사이의 차이에 따라 페미니즘의 이해(理解)와 이해(利害)가 크게 달라졌다. ‘경쟁력 있는 여성’이나 평등 개념에 익숙한 여성에게 페미니즘은 당연한 가치가 되었다. 사회구조로서 젠더보다, 여성 개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관심이 크다. 이른바, ‘나의 시대(me-meism)’ 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여성주의는 “여성 우선”이다. 문제는 누가 ‘여성’인가이다. 여기서 여성은 통념상의 생물학적 여성, 가부장제 체제에서 차별받은 여성, 남성에게 폭력과 피해를 당한 이들이다.
나도 모든 경우에 해당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성 소수자, 난민, 사회적 약자의 현실은 나중에 다룰 문제이거나 여성주의와 무관하다고 본다. 여성의 고통과 안전은 ‘여성 우선 페미니즘’으로 해결될 수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집단에는 ‘여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논의에서는 인간의 문제를 사회 구조에서 찾는 구조주의와 개인적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가 논쟁점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계층 이동이 불가능한 완벽한 구조의 시대이자, 그 상황에서 개인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철저한 개인의 시대를 열었다.
◇누가 여성인가
기존의 자유주의(리버럴리즘)에서 자유는 해방을 추구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 자유는 사회적 고립, 자발적 종속, 나만의 욕망 추구를 의미한다. 오해를 무릅쓰고 반복하면, 지금 여성주의의 대중화는 여성운동 자체의 동력도 대단했지만 신자유주의의 의도치 않은 결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후자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배경보다 능력을 중시한다. 그 능력도 부모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지만, 중산층 여성은 상대적으로 ‘이전보다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승부하려는 여성에게 ‘남성 우선 신분제’인 가부장제는 이해할 수 없는 봉건적 시스템이다. 이들에게 페미니즘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상식이다.
여성은 분명 차별 받고 있다. 그런데, 그 여성이 누구인가. 여성은 다양한 상황에서 살고 있다. 즉 자신이 시민이 아니라 여성으로만 ‘취급’되고 있다는 현실 인식은, 페미니즘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자 대학 입학과 난민을 반대하는 여성주의의 등장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사회정의, 연대로서 페미니즘의 이상은 더 이상 자명한 가치가 아니게 되었다.
여성주의는 ‘많은 여성이 하나가 되자’는 사유가 아니다. 여성주의는 대표적인 정체성(正體性)의 정치다. 이는 여성들은 모두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동일‘시’가 필요한 정치이다. 여성주의는 ‘어려운’ 사유다. 여성의 개념이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 아줌마, 외국인, 건강 약자, 비정규직 노동자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나를 ‘아줌마’로만 간주한다. 스스로는 건강 약자로서 정체성이 가장 강하다. 하지만 텔레그램 ‘박사방’ 같은 사건에 대해서는 여성으로서 그 누구하고도 연대할 수 있다.
나이든 여성과 젊은 여성, 가난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장애 여성과 비장애 여성의 삶의 조건의 격차는 성별의 그것보다 더 클 수 있다. 이는 성차별이 사소하기 때문에 다른 문제가 더 크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성의 상황은 천차만별인데, ‘신자유주의적 여성주의’는 단일한 여성을 상정하고 있어서다. 안타깝게도 많은 여성이 ‘신자유주의적 여성주의’를 지지하고 그것이 ‘원래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 이후의 여성주의
남성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독립적 여성, 즉 여성의 인간화는 여성주의의 오랜 목표였다. 근대 초기의 자유주의는 신분 질서로부터 해방, 휴머니즘을 의미했다. 이때 개인은 봉건주의의 비합리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이었다. 사회를 뜻하는 인간(人間)으로서 개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 개인의 의미는 타인을 짓밟고 살아남아야 하는 단절적 존재로서 개인(個人)이다. 신자유주의의 동력은 개인의 욕망이다. 코로나는 묻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페미니스트는 무엇을 지향 혹은 지양해야 하는가.
근대 이후, 인류의 기술 숭배는 자가 당착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전의 전쟁과 전염병은 모두가 망하는 공도동망(共倒同亡) 사안이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그 피해도 차별적이라는 사실이다. 국내 취약층부터 이주노동자, 대륙별 격차까지 경계도 다양하다. 여성주의는 ‘혁명’이 아니라 일상에 균열을 냄으로써 서구 남성 문명의 틈새를 확대하는 ‘진지전’이다. 그들과 같아져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여성주의는 이 상황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
페미니즘은 여성이 배제된 경험을 통해 성장했기에, 그 어느 사상보다도 ‘폭넓다’. 차별, 대상화, 착취와 폭력은 성별 제도 외에도 다른 사회적 모순과 교직(交織)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여성해방을 넘어 약자와의 공존, 자연과의 공생을 모색한다. ‘여성만의 문제’는 존재할 수 없다. 동시에 성차별을 해결하지 않으려는 그 어떤 사유도 대안일 수 없다. 발전주의와 양극화에 대한 페미니즘의 문제제기가 코로나 이후의 사회를 사유하는데 자원이 되길 기대한다.
정희진(여성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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