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정말 가능할까 싶던 전 국민 대상 코로나19 피해 구제용 현금 지급이 4일 시작됐다. 돈 이름이 ‘긴급재난지원금’인 만큼 당장 호구가 막막한 저소득층 283만여 가구가 첫날 수혜 대상이었다. 100만원(4인 가구) 정도면, 가뭄에 단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넉넉했을 리는 없다. 불로소득에 언감생심이기는 하다.
그래도 좀더 많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100만원쯤 없어도 별 문제 없는 사람들까지 살뜰히 챙기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물론, 돈이 누구한테 가야 더 잘 가는 건지 따지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러느라 실기하느니 일단 모두에게 준 뒤 부작용은 나중에 수습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다만 기존 복지 서비스 대상(소득 하위 50%) 기준을 그대로 갖다 썼으면, 그러니까 코앞 총선에서 표밭을 최대한 늘리려 여권이 욕심내지만 않았으면 지금처럼 ‘가성비’가 형편없지는 않았으리라는 게 보수 야권의 핀잔이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기부’다. 지원금이 절실하지 않은 고소득층이 기부금 명분으로 돈을 사양하게 유도하고 저소득층 구제에 들어가는 재정을 이걸로 메우면 되지 않겠냐는 발상이었다. 분위기는 정권에 유리해 보인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기부 기대감의 배경으로 거론한 ‘성숙한 시민의식’이,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방역 성과 견인 동력 중 하나라는 자부심에 많은 시민들이 고무돼 있어서다.
그러나 아무리 근사하게 포장하더라도 양심의 발로일 터인 기부를 정부가 나서서 해라 마라 한다는 게 자연스럽지는 않다. 지원금 지급 첫날 청와대 수석ㆍ보좌관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자발성을 몇 번이나 강조한 건 기부할 준비가 된 이들처럼 강요에 가까운 정부의 종용으로 해석하는 이 역시 적지 않다는 사실의 방증일 테다. 실제 개인 자유ㆍ도덕 영역마저 정부가 간섭하려는 거냐는 반발이 불거진 상태다.
어쨌든 빌미를 준 건 정부다. 재난지원금은 ‘기본소득’을 모델로 삼았다. 모든 개인에게 심사 없이 무조건 정기적으로 계속 일정 액수의 현금을 지급해 공동체 구성원의 소득 안정성을 보장하겠다는 게 기본소득 취지다. 푼돈이 필요 없는 부자한테까지 굳이 돈을 주는 식으로 설정한 건, 지급 대상을 추리는 데 들여야 할 행정상의 품이나, 사각지대 누락처럼 감수해야 할 희생에 비해, 사후에 형편이 괜찮은 계층으로부터 돌려받을 때 투입되거나 발생하는 비용ㆍ부작용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판단해서다. 그렇게 돌려받을 걸 전제로 줘놓고는 자발적 기부니 뭐니 하며 쭈뼛대니, 도리어 “토해내든 말든 내 마음 아니냐”는 적반하장이 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정부가 논란을 자초한 건 결국 기부가 틀린 답이어서다. 더 이상 부(富)가 부자의 시혜에 의해서만 공동체에 공유되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 부는 분배의 대상이고, 올바른 방식은 과세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세금인데도 정부가 부과를 주저하는 건 제 임무의 방기다. 표 달아날 게 두렵다고 기부 유도라는 편법으로 과세의 필요성을 호도하기보다 공정하게 걷어 정의롭게 쓰겠다고 공언하고 그걸 실천하려는 자세로 신뢰를 심어야 한다.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증세 없는 복지’를 허구라 비판하던 민주당은 어디로 갔나.
우파는 납세의 당위성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세금 낼 돈을 임의로 기부하겠다는 건, 공적 분배의 기능을 무시하고 정부 역할을 부정하는 시대착오적 태도다. ‘장제우의 세금수업’의 저자 장제우는 “세금은 사회적 연대의 수단”이라 했다. 이번 지원금 지급은 보편 복지, 나아가 기본소득 도입 가능성 타진을 위한 실험이 될 수 있다. 코로나 창궐 같은 재난이 더 자주 찾아올 공산이 크거니와, 삶 자체가 재난인 이들을 보듬는 건 인간의 본성인 연민의 소산이다. ‘국민 소득 3만달러’ 시대에 일하지 못한다고(않는다고) 존엄도 잃어서야 되겠나.
권경성 문화부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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