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꼭 1등이어야 하나요, 2등이면 안되나요?”
2009년 일본 집권당 민주당 렌호 의원이 공개 예산심사에서 던진 이 한마디는 당시 적잖은 화제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난 슈퍼컴퓨터를 만들겠다며 한 정부부처에서 올린 예산안 타당성을 따져 묻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1등 조급증에 사로잡힌 세상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반대 등 우여곡절 끝에 예산안은 통과했고, 어렵사리 탄생한 일본의 슈퍼컴퓨터 케이(京)는 세상에서 가장 연산이 빠른 컴퓨터라는 명성을 얼마간 누렸다는 뒷이야기도 있지만 굳이 이 이야기를 서두에 꺼낸 것은 최근 치러진 21대 총선을 복기해보고 싶어서다.
의원 300명을 뽑는 이번 총선에서 253명을 소선거구제로 선출하는 지역구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163석을 획득, 84석에 그친 미래통합당을 압도했다. 반면 전체 득표수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1,434만여표로, 미래통합당(1,211만여표)을 200만여표 앞서는 데 그쳤다.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결과치고는 표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은 선거제도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했다고 볼 수 없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상대방보다 한 표라도 많이 얻으면 당선되는 이른바 소선거구제의 맹점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특정 정당 편을 들기 위함이 아니다. 이 결과는 앞서 19대 총선에서 여야만 바뀌었을 뿐 두 정당의 전신이 받아 든 성적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선거구제가 낳은 가장 큰 폐해는 2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고착화하고 있다는 게다. 40%가 넘는 지지를 받은 적지 않은 후보가 낙선했는데, 이는 과반에 가까운 민의조차 소수의견으로 묵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승자독식 제도에서는 공천도 불합리할 개연성이 높다. 당에 쓴소리를 하거나 당의 의사에 반하는 당원의 공천은 배제된다. 이러다 보니 진보 정당내 온건파나 보수 정당내 개혁파들의 설 자리는 줄어든다. 진보와 보수 사이 중도가 사라지는 정치구도를 건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역사상 21차례 총선 중 4차례(9~12대)를 제외한 17차례가 소선거구로 치러졌으니 제도 자체를 탓할 수만은 없다. 제헌 국회시절부터 도입된 소선거구제는 유신독재 시절 중선거구제로 바뀌었으나, 이른바 1노3김시대 다시 소선거구제로 환원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제도를 변경할 때에는 나름대로의 의미는 존재했을 테지만, 늘 의도와는 다르게 흘렀다. 중선거구제는 군사정권의 의회권력 장악이라는 폐해를 낳았고, 또 다시 도입한 소선거구제는 3김이라는 거물급 정치인들의 입김 속에 양당구도, 지역정당 고착화라는 돌연변이가 탄생했다. 내리 8차례 치러진 총선에서 지역구도는 더 공고해져 대한민국 부(負)의 산물로 변질됐고, 이번 선거는 그 완결판에 다름 아니다. 부산에서 43.5%의 표를 얻은 민주당의 의석이 3석에 그치고, 호남 28곳 선거구 중 16개 지역에서 후보조차 내지 못한 미래통합당의 사례는 더 이상 소선거구제를 대한민국의 민의를 반영하는 척도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치권이 이런 병폐를 모를 리 없다. 총선에 앞서 여권을 중심으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한 것도 소선거구제 폐단을 조금이나마 상쇄하려는 일말의 양심이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역시 거대 여야의 꼼수 공천에 본래 취지는 퇴색했고, 제도는 누더기가 됐다.
이제 선거는 끝났다. 다시 4년을 기다려야 하는 만큼 시간도 충분하다. 이번에야 말로 3김시대 지역패권주의의 산물인 소선거구제의 과감한 손질이 필요할 때다. 이미 많은 대안이 거론되기도 했다. 중선거구제를 재도입하거나 아깝게 패한 후보를 구제해주는 석패율제 등도 있다. 당초 이번 선거에 도입하려고 했던 독일식 준연동영 비례대표제도를 다시 한번 차근하게 살펴보고 보완책을 내놓는 것도 방법이다. 지역구도를 타파하고, 결코 적지 않은 2등 후보의 지지자까지 껴안을 수 있는 최상의 선거제도가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한창만 지식콘텐츠 부장 cm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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