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사랑
오늘은 시를 하나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 싶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 그러나 너의 얼굴은 / 어둠 속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 번개처럼 / 번개처럼 / 금이 간 너의 얼굴은.”
김수영의 ‘사랑’이다. 김수영은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불안한 얼굴을 사랑하는 것’을 사랑으로 노래했다.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불안으로 균열된 타자의 정체성’에 대한 사랑이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사랑이라는 통찰을 선보였다. 우리 시대에 사랑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사랑의 사회학적 담론
한 개인이 일생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사랑이다. 사랑은 놀라운 공존감과 견디기 힘든 상실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이 사랑은 이성 간, 동성 간, 가족 간 등 여러 차원에서 존재한다.
사랑에 대한 담론은 방대하다. 문학과 예술에서 가장 많이 다뤄온 주제 중 하나였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연애로서의 사랑’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다. 그 까닭은, 사회가 변화하듯, 이 사랑 역시 사회적 구속을 받아 변화한다는 데 있다.
사랑을 다룰 때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사랑이란 대체 뭐냐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누군가와의 소통을 갈망하는 존재다. 사랑 역시 이러한 소통의 한 양식임을 부각시킨 사회학자는 니클라스 루만이다. 루만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에서 현대사회에서 열정으로서의 사랑이 더 이상 도덕적ㆍ경제적 이해관계에 지배받지 않는 독립 영역으로 자리 잡았음을 주목했다. 사랑은 개인이 다른 이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친밀성의 코드를 함의한다.
후기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 처한 현실을 포괄적으로 다룬 사회학자들은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이다. 이들은 ‘사랑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에서 개인주의화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증가가 낳은 사랑ㆍ결혼ㆍ가족의 변동을 추적했다. 그 결과가 바로 ‘남녀 간의 전쟁’이다. 벡과 벡-게른스하임은 가사와 양육 등 모든 것들이 전쟁의 타협 대상이 됨으로써 성별 분업에 기초한 근대적 핵가족 모델이 큰 위기를 겪게 됐다고 분석했다.
사랑의 후기 현대적 변화를 명료하게 설명한 사회학자는 앤서니 기든스다. 기든스는 ‘친밀성의 구조변동’에서 서구사회의 친밀성, 즉 사랑과 섹슈얼리티의 역사적 변화를 주목했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현상은 두 가지였다. 하나가 18세기 로맨스의 ‘낭만적 사랑’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근대과학 발전에 따른 출산과 사랑의 분리였다. 전자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는 현대적 사랑의 원형을 이뤘다면, 후자는 섹슈얼리티를 사랑의 핵심 요소로 부각시켜 사랑의 아노미를 낳았다.
오늘날 사랑이 처한 현실을 적절히 보여주는 기든스의 개념이 ‘플라스틱 섹슈얼리티’다. 이 개념에 담긴 함의는 과거와 달리 현대에서 타인과의 성적 결합에서의 자유재량권이 증가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평생을 함께 하는 낭만적 사랑은 힘을 잃었고, 그 자리를 격정적이며 우연적인 ‘맹목적 사랑’이 대신했다. 이 플라스틱 섹슈얼리티의 등장으로 사랑의 관계는 ‘순수한 관계’로 변화했다. 순수한 관계란 감정적·성적으로 평등한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후기 현대의 사랑에 대한 기든스의 대안이 ‘합류적 사랑’이다. 합류적 사랑이란 두 사람의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공존의 감정을 교환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함께 형성해가는 사랑을 말한다. 차이 속에 동일성을 만들어가며, 이 동일성 속에 차이를 승인하는 게 사랑의 새로운 규범이 돼야 한다고 기든스는 역설했다.
요컨대, 사회학적으로 사랑은 신뢰와 평등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친밀감이다. 오늘날 사랑은 절로 완성되지 않는다. 신뢰와 평등이라는 ‘감정의 민주주의’가 발휘될 때에 사랑은 비로소 축복이 될 수 있다.
◇2020년대와 사랑의 미래
21세기에 들어와 사랑의 탐구를 심화시킨 이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다. 바우만은 ‘리퀴드 러브’에서 오늘날의 사랑을 액체 사랑이라고 명명한다. 액체 사랑의 ‘액체’는 그가 주조한 ‘액체 현대 이론’에서 가져온 것이다. 액체 현대란 현대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끝없는 유동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시대를 함의한다.
바우만에게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는 한편으로 필사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결혼과 같은 관계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그 결과, 사랑의 불안감과 그로 인한 유동성이 커진다. 이를 바우만은 문자메시지 사례로 설명한다.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중요한 것은 메시지의 내용이 아니라 빈도다. 느슨한 연결의 네트워크 속에서 사랑은 마치 액체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일루즈는 ‘사랑은 왜 아픈가’를 통해 사랑의 대한 날카로운 사회학적 설명을 내놓는다. 사회학자 박형신은 일루즈를 ‘사랑의 사회학자’라고 칭하기에 충분하다고 고평(高評)한다. 선택 아키텍처, 결혼시장, ‘섹스 장’, 에로스 자본, 감정 불평등, 감정적 지배 등 독창적 개념들을 바탕으로 일루즈는 오늘날 사랑이 왜 상처 받는지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한다.
일루즈에 따르면, 사랑의 상처는 자존감 상실이라는 고통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고통의 원인은 심리적 요인보다 사회적 요인, 즉 현대 제도와 가치에서 찾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사랑이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일로 변화하면서 사랑의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결혼시장이 형성됐고, 이 결혼시장에서 무엇보다 ‘성적 매력’이 중요한 가치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동이 결혼과 섹스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은 선택의 자유를 누리게 함으로써 결국 남자가 여자를 감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했다는 게 일루즈의 분석이다.
일루즈가 사랑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자아를 떠받드는 중요한 사회적 토대의 하나다. (…) 우리는 섹스와 감정의 관계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히 윤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런 관계야말로 자아의 자존감과 가치를 키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새로운 형식의 열정적 사랑에 대한 희망을 일루즈는 포기하지 않고 있다.
2020년대에 사랑의 미래는 그렇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후기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사랑에 빠지길 갈망하는 동시에 그 사랑에서 빠져 나오길 갈구한다는 바우만의 관찰은 날카롭다. 한편에선 사랑이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다른 한편에선 사랑이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자존감을 결정짓는 위력을 발휘하는 역설에 대한 일루즈의 통찰은 설득력 높다.
분명한 것은, 현대성에 내재한 개인주의화가 사랑의 자유를 증진시켰지만 그 자유가 역설적으로 감정 불평등 등 사랑의 그늘을 강화시켰다는 점이다. 개인주의화가 비가역적인 것처럼, 자유와 그늘이라는 사랑에 내재한 모순적 경향은 2020년대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사랑이 가치 있는 일이라면, 김수영의 말처럼 불안으로 균열된 타자의 정체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랑 본래의 의미는 우리 인류가 여전히 추구할 만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사회와 사랑의 변화
우리 사회에서 사랑의 변화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서구사회에서 개인주의화가 친밀성의 변동에 결정적이었듯, 우리 사회에서도 개인주의의 발전이 사랑과 결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90년대 신세대가 주도한 개인주의 문화는 사랑과 결혼에서의 서구사회와 한국사회의 거리를 크게 좁혀 놓았다.
구체적으로 우리 사회 역시 일루즈가 분석했던 결혼시장의 등장이라는 ‘사랑의 일대 전환’과 마주해 왔다. 최근 젊은 세대에서 만혼 또는 비혼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2017년의 경우 남자의 초혼 평균은 연령 32.9세였고, 여자의 연령은 30.2세였다. 2020년대에 이러한 만혼 경향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가족에 대한 생각의 변화 또한 가져오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결혼과 가족은 의무가 아닌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만혼과 함께 비혼 경향이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섣부르게 가치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변동이 가져오는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증가, 1인 가구의 증대, 다양한 가족 형태의 등장 등의 결과에 대해선 다각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의 굿모닝 2020s’는 2020년대 지구적 사회변동의 탐색을 통해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화요일에 찾아옵니다. 다음주에는 ‘팍스 시니카’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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