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페미니즘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됐지만, 이론과 실천 모두 여전히 어렵습니다. ‘바로 본다, 젠더’는 페미니즘 시대를 헤쳐나갈 길잡이가 돼줄 책들을 소개합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3> 마거릿 애트우드 ‘오릭스와 크레이크’
‘눈사람’은 외로웠다. 신인류 크레이커들 사이에서. 팬데믹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는 도대체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 자신의 삶을 되짚는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오릭스와 크레이크(Oryx and Crake)’의 내용이다.
인류가 파국을 맞이하기 전, 눈사람의 이름은 ‘지미’였다. 그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국가가 소멸하고 유전자 조작 상품을 생산하는 초국적 거대 기업들이 ‘조합’이라는 이름의 복합생활단지를 형성해 소비자-국민을 지배하는 ‘시장-국가’의 세계를 살고 있다.
지미의 친구인 ‘크레이크’는 뛰어난 유전공학자로 가장 큰 조합으로 스카우트되고, 그곳에서 크레이커(Craker, 크레이크의 아이)를 창조한다. 크레이커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비인간 동물의 특성을 갖고 있다. 예컨대 몸에서는 벌레를 쫓는 시트러스 향이 나고, 특정 시기에만 발정하며, 체변을 식량으로 삼는다. ‘오릭스’는 실험실에 갇혀 있는 크레이커들에게 생존을 위한 지혜를 알려 주는 사람이다.
시간이 지나 크레이커들이 독립할 수 있는 때가 되자, 크레이크는 인간을 공격하는 강력한 바이러스를 전 지구에 동시다발적으로 활성화시킨다. 오직 지미에게만 항체를 주입하고 “뒷일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긴 채.
크레이크는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미친 남성 과학자’ 계보에 속한다. 이들은 인간 이성에 대한 극단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과학기술과 함께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라선 자들이다. 크레이크는 “시간과 공간을 소모하는” 인간에 대한 경멸로 인류 종말을 계획했다.
한편 오릭스는 “창녀와 어머니”의 형상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다. 오릭스는 크레이크의 연인이자 지미의 연인이고, 크레이커들의 어머니이면서 동물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오릭스와 크레이크’는 ‘어머니-대자연과 아버지-문명’이라는 익숙한 대비를 보여 주는 듯도 하다.
하지만 오릭스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 특히 ‘시녀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돼야 한다. 애트우드는 ‘시녀이야기’에서 가부장적인 독재 국가가 어떻게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재생산권을 통제하는가를 탐구했다. ‘오릭스와 크레이크’로 오면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시장이 국가의 자리를 대체했을 뿐이다. 이 자본화된 과학기술의 세계는 여성으로 하여금 “창녀이자 어머니”이기를 강요한다.
결국 ‘대자연 어머니-오릭스’란 이미 “남성-인간-이성-과학-문명”이라는 신화 위에 서 있는 근대 가부장제의 산물인 셈이다.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조합으로부터 도망쳐 반군에 합류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지미의 어머니 ‘샤론’이다. 애트우드는 조합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는 오릭스와 그에 저항하는 샤론을 대비시킨다.
그러므로 책의 제목 ‘오릭스와 크레이크’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아니라, ‘와(and)’로 연결되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하나의 세계를 지시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여성과 생명을 착취하는 남성적인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이 어떻게 인간의 공멸을 초래하는지, 서늘하게 경고하고 있다.
오릭스와 크레이크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ㆍ차은정 옮김
민음사 발행ㆍ636쪽ㆍ1만5,000원
최근 이 책이 떠오른 건 이 때문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다양한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강력한 국가의 국민 통제에서 문제 해결의 답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생태 백신”(최재천)이다.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을 넘어서 다양한 생명이 공생·공존하는 생태계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인간의 이성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겸손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애트우드는 ‘오릭스와 크레이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건 디스토피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다. 종말을 맞이한 건 인간뿐이지 않은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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