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n번방을 막아라] <중>왜곡된 성의식, 겉도는 성교육 
 초중고생 14% “성차별 경험ㆍ목격”… 65%는 “신고 안하고 넘어가” 
 교육현장 젠더갈등ㆍ혐오 커졌지만 성평등 교육은 “하지 마라” 반복 
[저작권 한국일보] 성평등 교육의 부재가 '조주빈'을 키웠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텔레그램 '박사방'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 착취물을 제작ㆍ유포한 혐의를 받는 운영자 조주빈이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고영권 기자

텔레그램 ‘n번방’에는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에도 10대들이 포함돼 공분이 일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피해자를 협박하고 성적으로 착취하는 이들의 악랄한 범죄에 많은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이로 인해 이들이 그릇된 성관념을 갖기까지 교육은 뭘 했느냐는 목소리가 높다. 교육 현장에서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성평등 교육이 수많은 피해자를 낳고, ‘박사방’의 주범 조주빈(25)을 키웠다는 지적이다.

 
 ◇ 초등 교사가 “공주님 분홍색 속옷 이뻐요” 댓글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초중등 성평등 교육의 요구 현실과 활성화 방안’ 보고서를 통해 교육현장에서 학생들간의 젠더갈등과 혐오, 피해의식이 증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연구진이 전국 190개 초ㆍ증ㆍ고등학교 학생 4,0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 지난 1년간 학교에서 성차별적 발언이나 행동을 본인이 직접 당하거나 다른 사람이 한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14.1%였다. 하지만 이런 성차별적 경험을 하거나 목격했을 때 3명 중 2명 꼴인 64.7%가 ‘그냥 넘어갔다’고 응답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학생들이 도움을 요청하거나 신고할 수 있는 통로가 없던 것이다. 학생들의 38.8%는 유튜브나 페이스북, 트위터 등 온라인 공간에서도 성차별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성차별적 발언과 행동을 당하거나 목격한 경험. 그래픽=김대훈 기자

일부 교사들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도 문제로 지적된다. 여학교에서 성희롱과 성차별을 경험한 학생 75.7%가 가해자가 교사였다고 응답했다. 최근 울산의 40대 초등학교 남교사가 담임을 맡고 있는 1학년 학생들에게 숙제로 ‘자기 팬티 빨기’를 내고 학급밴드에 학생들이 올린 사진 게시물에 ‘매력적이고 섹시한 친구’, ‘울 공주님 분홍색 속옷 이뻐요’ 등의 댓글을 달았다가 학부모의 항의로 업무배제가 되기도 했다. 초등학생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문제 발언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는 비판에도 이 교사는 “숙제를 재미있게 내려고 생각했던 것으로 이전에 같은 숙제를 냈을 땐 항의가 없었다”라고 해명해 성인지 감수성이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현장 전문가들은 “스쿨미투(학교에서 나도 당했다)가 2018년부터 전국적으로 터지기 시작하면서 교사들이 그나마 긴장하기 시작했지만, 스쿨미투 이전 세대들에게는 성평등 의식이 가치나 생각의 기준으로 작동되지 않아온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전국교육대학생연합이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가해자 엄중 처벌과 교육계의 성인지 감수성 제고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밤 늦게 돌아다니지 마’ 식에 그치는 성평등 교육 

스쿨미투, n번방 사건 등 학생들과 밀접한 성폭력 사건들은 계속 발생하고 있는 반면 성평등 교육은 학생들에게 의미있는 효과를 거두고 있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전히 전교생이나 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특별활동이나 재량활동 시간에 이뤄져 학생들에게 ‘노는 시간’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교육 내용도 문제가 많다. 현장 전문가들은 임신과 출산 위주 생물학적인 성교육, ‘피해자 되지 않기’를 위주로 가르치는 성폭력예방교육 등 현행 성평등 교육은 △‘하지마라’식의 교육 △ ‘응징 서사가 지배하는’ 교육 △ ‘논의를 촉진하는 방식보다는 통제하는 교육’이라고 꼬집었다. ‘밤 늦게 돌아다니지 마라’는 식의 가르침으로, 결국 피해자가 잘못해 그런 일을 당한다는 교육에 그친다는 얘기다.

교육 소관 부서도 제각각이다. 성교육은 보건교육에 종속되면서 교육부의 학생건강과가, 성폭력예방교육과 양성평등교육은 교육부 양성평등정책담당관실이 각각 맡고 있다. 연구를 진행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최윤정 센터장은 “구조적으로 젠더 교육 주체가 나뉘어 있는 상황에서는 디지털 성폭력 등 새로운 이슈에 대응해야 할 때 통합이 되지 않고 추동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여성가족부 산하 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개발, 제작한 성평등 콘텐츠 플랫폼인 '젠더온'에 지난 3월 게재된 불법촬영 관련 영상 콘텐츠. 젠더온 화면 캡쳐
 
 ◇‘성평등 교육’ 교육과정 안에 포함돼야 

n번방 사건 대책으로 여성가족부는 산하 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지난해 7월 마련한 성평등 콘텐츠 플랫폼인 ‘젠더온’의 디지털 성범죄 예방교육 자료를 교육부에 전달했다. 강의안과 카드뉴스, 동영상 자료까지 700여종에 달하는 콘텐츠를 보유해 ‘양질의 성평등 콘텐츠’를 제공하는 젠더온을 통해 ‘시간 떼우기 용’으로 비판받는 성평등 교육을 업그레이드 시키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성평등 교육이 교과과정 안에 포함되는 것이 급선무라고 입을 모은다. ‘양성평등교육’을 지금과 같이 학내 재량활동에 국한시킬 게 아니라 정규 교과과정 속으로 편입돼야 한다는 얘기다. 최 센터장은 “투표와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사회교과에 여성의 참정권 투쟁이나 여성 국회의원 비율 등을 함께 다루는 등 교육과정에서 젠더의식을 키우도록 해야 한다”며 “양성평등교육은 교과과정 속에서 이뤄졌을 때 훨씬 효과가 좋다”고 강조했다.

성평등 교육을 현재보다 넓은 범위로 확대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강조된다. 그간의 성교육 체계 안에서 다뤄진 적이 없던 ‘섹슈얼리티(성애) 교육’을 도입하고 개인의 건강과 복지, 인간 관계에서의 존엄과 존중, 성적 자기결정권과 권리의 보호에 이르는 전인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근거법 및 추진내용이 달라 흩어져 있는 젠더 관련 교육을 하나의 성평등 교육 체계로 재정립하고, 교직 의무과목으로 성평등 교육과 인권교육을 반영해 교사들의 성인지 감수성 재고도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제언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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