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엔 공용어가 2개다. 하나는 물론 한국어,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한국수어(手語)다. 수어는 2016년 한국어와 동등한 법적 지위를 얻었다. 한국어의 보조 수단이 아닌, 독립된 고유 언어라는 얘기다. 당연히 ‘언어예술’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연기부터 노래, 랩, 때로는 춤까지. 수어 연극 ‘사라지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사라지는 사람들’에는 농인(聾人ㆍ수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인) 배우 7명과 청인(聽人ㆍ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배우 5명이 함께 나온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수어와 음성언어로 대사를 주고받고 화음을 이룬다. 그림을 그리는 듯, 혹은 춤을 추는 듯, 다채로운 손의 언어가 눈으로 들린다. 소리가 없으면 노래도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간의 편견과 무지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무대다.
‘사라지는 사람들’은 코로나19 피해 지원에 나선 세종문화회관의 온라인 공연작으로 선정됐다. 28일 오후 3시 생중계로 ‘안방 1열’ 관객을 만나고, 이후 5월 말까지 무료로 공개된다. 수어가 잘 보여야 해서 수어 연극은 200석 규모가 한계였는데, 랜선 중계 덕분에 훨씬 많은 관객을 만나게 됐다.
“지난해 시범 공연을 준비하면서 ‘언젠가 세종문화회관에서도 공연해 봤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우리끼리 나눴는데 진짜로 꿈이 이뤄졌어요.” ‘사라지는 사람들’을 제작한 농인예술인단체 ‘핸드스피크’의 정정윤(35) 대표, 연출과 극작을 맡은 극단 ‘공연창작소 공간’의 박경식(35) 연출가, 농인 배우 김승수(28)씨, 청인 배우 장영주(34)씨를 17일 서울 신대방동 연습실에서 만났다. 승수씨와의 대화는 수어 통역사의 도움을 받았다.
수어 연극이 처음은 아니다. 배우, 댄서, 디자이너 등 농인 예술가 20여명이 소속된 핸드스피크는 연극뿐 아니라 음악이 중심인 수어 뮤지컬과 댄스극도 제작해 무대에 올린 경험이 있다. 당시엔 청인 배우들이 무대 밖에서 목소리 연기를 했다. “농인이 왜 일방적으로 배려받아야 하지. 농인과 청인이 함께 무대에 설 순 없을까.” 정 대표가 고민 끝에 박 연출에게 극작과 연출을 부탁하면서 ‘사라지는 사람들’이 시작됐다.
수어 연극이라서 장애 문제와 인식 개선 등을 다룰 거라 생각했다면 그 또한 편견이다. 전쟁 속에 피어난 순수한 사랑을 통해 혐오와 차별을 돌아보고, 피난길에 부상당한 약자가 버려지는 비극을 그리며 인간의 이기심과 잔인함을 들춘다. 박 연출은 “공연 자체의 완결성이 우선이고 누가 출연하느냐는 다음 문제”라며 “모두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언어로 무대에선 어떻게 교감할까. 돌아온 답은, 바로 “1인 2역”이었다. 청인 배우는 고유 배역 외에 농인 배우의 목소리 역을 하나 더 맡는다. 마찬가지로 농인 배우도 청인 배우의 수어 역까지 2개 역할을 연기한다. 모든 대사는 수어와 음성언어로 동시에 구현된다. 동시통역, 더빙에 비유할 수 있다.
그 과정은 만만치 않다. 농인이 한국어 문장을 단번에 읽고 이해하기는 힘들다. 수어는 문법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널 사랑해’를 ‘아이 러브 유’로 표현하는 식이다. 청인이 외국어를 이해할 때처럼, 반드시 번역이 필요하다. 승수씨는 “수어 단어가 음성언어의 5%밖에 없어서 특히 비유나 은유를 표현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다”고 말했다.
서로 언어를 몰라도 배우들은 대사의 시작과 끝은 물론, 음악에 맞춘 동선과 안무도 딱딱 맞춘다. 소품의 이동과 조명의 변화, 작은 손짓까지 모든 것이 약속된 신호다. 농인 배우들은 소리 대신 진동으로 느낀다. 그 후엔 될 때까지 연습, 또 연습이다. “청인 배우가 농인 배우에게 다 맞춰줄 것 같지만, 전혀 아니에요. 농인도 청인의 대사 속도에 맞춰 수어를 해요. 수어가 구어보다 짧거든요. 상대의 호흡을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되죠.”
승수씨의 얘기에 영주씨가 보탰다. “눈빛만 봐도 통한다고 하잖아요. 정말 그래요. 이젠 제가 엉터리 수어로 얘기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요(웃음). 한번은 비밀 얘기를 하는데 농인 친구가 ‘말 조심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얼른 팔짱을 꼈어요. 농인 문화에 서서히 익숙해지는 거 같아요.”
승수씨는 단편영화까지 만든 영화감독 지망생, 영주씨는 15년차 베테랑 연극배우다. 이번 공연에서 남녀주인공으로 호흡을 맞춘다.
그동안 농인들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문화예술에서 배제돼 왔다. 농인이 창작자로 나설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정 대표와 박 연출가는 문화예술계에서도 특히 어렵다는 공연계에서 농인 예술가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발견했다. 박 연출가는 “예술성은 장애ㆍ비장애와 무관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연극은 항상 새로운 무대 언어를 고민해요. 그런 점에서 수어는 굉장히 연극적인 언어예요. 손뿐 아니라, 몸짓, 표정, 시선까지 의미를 담고 있거든요. 수어에서 파생된 새로운 움직임과 표현들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봐요.”
요즈음 코로나19 브리핑 뉴스를 보면 화면에 정부 당국자와 수어 통역자가 같은 비중으로 등장한다. 수어 통역을 작은 동그라미 화면에 줄여 넣던 과거와는 다르다. 작지만 큰 변화다. 공연장도 마찬가지다. 해외 관광객이 오면 자막 서비스를 지원하듯, 한글 자막만 있어도 농인들은 세상 속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정 대표는 “예술은 삶과 삶을 이어주고 인간을 성장하게 한다”며 “이번 온라인 공연으로 농인 예술가의 특별한 재능을 알리고 나아가 농인 청년들의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고 바랐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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