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가디너 타일러(Julia Gardiner Tyler, 1820.5.4~1889.7.10)는 미국 10대 대통령 존 타일러(1790~1862)의 두 번째 아내로, 대통령과 결혼해 퍼스트레이디가 된 최초의 여성이다. 부통령이던 존 타일러는 9대 대통령 윌리엄 해리슨이 장티푸스와 폐렴 합병증으로 취임 31일 만에 숨지면서 대통령 직을 승계했다. 줄리아와 결혼한 1844년 6월은 대통령 임기 8개월여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8개월 퍼스트레이디’였지만, 줄리아는 19세기 여성으로서는 예외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며 30세 연상인 남편의 직무를 보좌했다.
뉴욕 주 상원의원이던 데이비드 가디너와 부유한 상속녀 어머니의 딸 줄리아는 당대 남성 못지 않은 고급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9세기 초 사회가 여성, 특히 상류층 여성에게 요구한 건 아내와 어머니 역할이 전부였다. 그러니 1839년 18세의 줄리아가 한 백화점 광고에 ‘롱 아일랜드의 장미’라는 타이틀을 달고 한 남성과 함께 모델로 등장한 것은 스캔들이자 가문의 수치였다. 부모가 그를 데리고 곧장 유럽 여행을 떠난 건 스캔들을 잠재우기 위한 일종의 도피였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를 돌며 왕가와 귀족들을 만나는, 고전적인 여성 교양과 부덕(婦德)의 견학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서 줄리아가 본 것은 부덕이 아니라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지위와 권력이었다. 가족은 41년 9월 뉴욕으로 돌아왔고, 줄리아는 42년 1월 백악관 만찬에서 존 타일러를 처음 만났다. 8개월 뒤 존 타일러는 상처(喪妻)했고, 5개월 뒤인 43년 2월 27세 딸을 둔 52세의 존 타일러는 22세의 줄리아에게 처음 프로포즈했다.
존 타일러는 44년 2월 포토맥 강에 정박한 미 해군 프린스턴호 함상에서 개최한 연회에 줄리아 일가를 초대했다. 그날 해군 함포 쇼 사고로 국무장관과 줄리아의 아버지 데이비드 등 여럿이 숨졌다. 4개월 뒤 줄리아는 대통령과 결혼했고, 남부연맹 독립과 노예제 옹호 등 존 타일러의 정책에 적극 조언했다. 부부는 7남매를 낳았다.
1865년 4월 링컨이 암살된 직후 성난 군중은 남부연합기를 게양하고 있던 스태튼 아일랜드의 줄리아 저택에 각목을 들고 난입, 줄리아가 자랑 삼던 “최고급 삼색기”를 찢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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