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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잔다르크의 전설 혹은 신화(4.29)

입력
2020.04.29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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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그린 ‘샤를 7세 대관식의 잔다르크’. 루브르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19세기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그린 ‘샤를 7세 대관식의 잔다르크’. 루브르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명장 이순신의 찬란한 업적과 별개로, 박정희 정권이 1968년 4월 서울 광화문 광장에 그의 동상을 세운 것은 한일협정(66년)과 3선 개헌(67년)으로 앙상해진 권력의 기반을 지탱하기 위해서였다. 그냥 영웅으로도 부족해서 ‘성웅(聖雄)’이 필요했다. ‘오를레앙의 성녀’ 잔다르크(Joan of Arc, 1412~1431)가 ‘성인(saint)’으로 추서된 것은 1차 대전 와중인 1920년이었다. 2차 대전 중 프랑스의 나치 괴뢰 비시 정부와 레지스탕스는 모두 잔다르크의 깃발로 자신들의 투쟁을 정당화했다.

영국과의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429년,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샤를 왕세자가 변방 한 소작농의 10대 딸에게 군통수권을 선뜻 내준 데는 잔다르크가 들었다는 대천사 미카엘과 성 카테리나, 성 마르가리타의 ‘음성’이 있었듯이, 20세기 국민국가의 정통성도 잔다르크의 깃발에 기대야 했다. 잔다르크는 1429년 4월 29일 오를레앙을 헨리 6세의 잉글랜드 군대로부터 해방시켜 왕세자에게 샤를7세의 왕관을 쓰게 했다. 신의 뜻으로 왕통을 이은 거였다.

그런 배경 탓에, 영국과 프랑스의 유서 깊은 민족적 갈등 탓에, 잔다르크의 신화 혹은 역사를 갉는 이야기들은 많다. 아무리 신과 천사가 살아 있던 시절이었어도 풍전등화의 전란 중에 칼도 안 잡아본 10대 소녀에게 군권을 맡기는 게 말이 되냐는 반론부터, 두 번의 화형에도 심장이 타지 않아 세 번째 화형을 감행해야 했다는 건 마법적 전설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가 화형당하지 않고 57세까지 살았다고 주장하는 인류학자도 있고, 실제론 남성이었다는 설도 있다.

잔다르크의 공식 역사는 1431년 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된 뒤 잉글랜드와 반 샤를가 귀족인 버건디 공작가에서 받은 7차례 재판 기록이 뼈대다. 기록에 따르면 이교도로 재판정에 선 19세의 그는 ‘우상을 숭배한 마녀’로 루앙 광장에서 화형 당했고, 유해는 센 강변에 뿌려졌다. 파리의 한 약종상이 장작더미에서 유해 일부를 수거, 은밀히 보관해온 사실이 1867년 알려졌고, 2006년 한 연구팀이 박물관에 보관된 그 유해의 DNA 분석과 탄소연대측정을 시도, 15세기 린넨 옷감 성분과 젊은 여성 DNA를 확인했다. 물론 그것이 잔다르크의 진실을 확증한 것은 아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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