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회랑 로자 데이 란치(Loggia dei Lanzi)에 가면 첼리니의 페르세우스 청동상, 헤라클레스상, 메디치 사자상 등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들이 관광객을 맞이한다. 그중에서도 16세기 조각가 잠볼로냐(Giambologna)의 ‘사비니 여인의 납치’는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사비니 여인의 납치’는 사방을 돌며 감상해야 하는 세 인물을 화려한 기교로 스펙터클하게 묘사한 조각상이다. 젊은 로마인 남자는 여자를 공중으로 힘차게 들어 올리고 있고, 여인은 왼쪽 팔을 위로 뻗치며 자신을 거칠게 움켜쥔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들 아래에는 여인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폭행을 당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절망과 공포에 떨고 있다.
신의 손을 가진 듯한 잠볼로냐는 남성의 몸을 머슬 대회의 챔피언 같은 근육질 짐승남으로 빚어냈고, 여성의 몸은 육감적이고 관능적으로 창조했다. 뱀 같이 꿈틀거리는 나선형으로 움직이는 세 인물의 뒤틀리고 얽힌 몸은 폭발적인 활력과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다. 인물들의 과장된 몸짓과 강렬한 감정의 표현은 르네상스 고전주의 조각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의 고요함과 대조적인 매너리즘(Mannerism) 양식을 보여 준다. 전에는 이같이 복잡한 구성의 조각품들은 별도의 조각 부분들을 제작한 후 서로 연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잠볼로냐는 이 작품에서 하나의 대리석 덩어리를 사용해 복잡하게 얽힌 역동적인 구성을 시도했고, 어려운 기술적 균형의 문제를 해결하여 16세기 말 유럽 최고의 조각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런데 미학적 감상을 떠나 젠더 감수성(gender sensitivity), 즉 성인지 감수성의 관점에서 이 작품을 바라본다면 사뭇 다르게 보인다. 매년 수십만 명의 관광객에게 보여지는 이 조각상의 진실은 무엇인가. 강제 납치에서 탈출하고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는 여성, 그리고 여성을 전쟁의 전리품,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남성의 폭력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여성의 이러한 절박한 상황은 조각상에서 전혀 잔혹한 폭력의 서사로 표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멋진 근육을 가진 남성의 육체와 감각적인 여체의 형상으로 재현된 조각상을 보고 어떤 의문이나 비판적인 생각 없이 감상하고 찬미한다. 현실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납치, 성범죄가 예술품 속에서는 미화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사비니 여인의 납치’는 로마 건국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신화에 의하면 로물루스는 로마에 도시를 건설하지만 여성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이웃의 사비니 족 여인들을 약탈한다. 이 이야기는 르네상스의 화가들, 푸생, 다비드, 루벤스 등 수많은 거장 예술가들이 그린 인기 있는 소재였다. 미술사에서는 ‘사비니 여인의 납치’ 외에도 ‘레다와 백조’, ‘다나에’ 등 겁탈을 미화한 작품들이 드물지 않다. 남성 미술가들이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 중심적인 관점에서 강간, 성폭력을 에로티시즘의 측면으로 그리고 조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성에 대한 이러한 성적 폭력이 까마득한 과거 역사의 일에 불과할까? 최근 엄청난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n번방’ 사건은 여성에 대한 끔찍한 성착취를 자행했다는 점에서, 사비니 여인들을 약탈한 고대신화 속 미개함과 야만성이 현대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 준다. 다른 점은 실제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온라인 공간에서 일어났다는 것뿐이다.
미술작품들 속에 교묘하게 미화된 채 숨어 있는 성폭력적 요소를 알아채지 못하는 우리의 인식도 한 번쯤 체크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남성에게 관대한 성문화, 왜곡된 성의식이 지배적이었다. 이제 바뀔 때도 되었다. 사회의 전체적인 성의식 변화는 여성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남성도 자유롭게 할 것이다.
김선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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