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정기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기간산업 업종에서 정유업이 빠져 논란이 일고 있다. 다른 업종에 비해 감원을 단행할 만큼 어렵지 않다는 게 정부 판단이지만, 정작 정유업계는 당장 유동성 위기에 처해 있다며 볼멘 소리를 쏟아냈다.
22일 정유업계에선 정부의 기간산업 안정기금 지원 대상에 포함되지 못한 데 대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이날 오전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5차 비상경제회의에서 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자금난에 몰린 항공, 해운, 자동차, 조선, 기계, 전력, 통신의 7개 업종에만 40조원의 기간산업 안정기금을 공급하기로 했다.
정부 관계자는 정유업 배제 배경에 대해 “아직 감원을 단행할 만큼 어렵지 않고, 고용 효과도 크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정유업계 관계자는 “노동 집약적 산업이 아니긴 하지만, 당장 유동성 위기에 처한 것은 다른 기간산업과 마찬가지”라며 “정부에서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호소는 이날 오후 열린 산업통상자원부의 정유업계 간담회에서 쏟아져 나왔다. 간담회에는 김효석 대한석유협회 회장, 조경목 SK에너지 사장, 허세홍 GS칼텍스 사장, 류열 에쓰오일 사장, 강달호 현대오일뱅크 사장 등이 참석했다. 간담회에 앞서 김 협회장은 “단기적 처방으로는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납세 유예와 감세 등을 정부에 제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의 반발을 의식한 듯 산업부는 간담회에서 △석유수입ㆍ판매부과금 및 관세 납부 유예 △석유공사 여유 비축시설 임대 △전략 비축유 조기ㆍ추가 구매 등 기존 지원책에 더해 석유공사 비축시설 대여료를 한시 인하하고, 석유관리원 품질검사 수수료를 2, 3개월 납부 유예하는 방안 등의 추가 지원책을 제시했다. 이 자리에서 성윤모 산업부 장관은 “정유업계가 처한 위기 상황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다”며 “정유업계 위기 극복과 경쟁력 유지를 위해 앞으로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국세청도 이날 정유업계에 대해 4월분 교통ㆍ에너지ㆍ환경ㆍ개별소비세 납부를 7월까지 유예키로 했다. 국세청은 이 조치로 정유업계가 총 1조3,745억원의 자금 부담을 덜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정유업계는 정부의 추가 지원책 발표에 다소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위기감은 여전하다고 토로한다. 수요 절벽으로 국제유가가 연일 곤두박칠치고 있기 때문이다. 20일(현지시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이 사상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한 데 이어 21일에는 브렌트유마저 18년 만에 최저 가격을 찍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누가 먼저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며 불안감을 호소했다. 실제 올해 1분기 정유사들의 실적은 ‘어닝 쇼크’가 우려된다. 정유업계와 증권가에 따르면 1분기 정유 4사의 영업손실은 역대 최대인 3조원 규모로 예상된다.
업계는 최악의 ‘보릿고개’를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SK에너지는 현금 흐름이 악화하는 상황을 대비해 기업어음(CP)과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확보하고 있다. 1~4월 총 1조9,850억원 규모의 CP를 발행했다. SK에너지의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투자가 아닌 버티기 목적으로 자금을 조달한 것은 창사 이래 처음”이라고 말했다. 현대오일뱅크도 지난달 7,800억원의 CP를 발행했다.
김경준 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