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대법원에서는 흥미로운 판결이 있었다. ‘우리’라는 은행 명칭은 특정 은행이 독점하여 배타적 권리를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은행’이라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표현방식이 ‘우리은행’으로 인해 혼동되며, 여기에 상표법에 따라 배타권이 주어지면 ‘우리∨은행’이라는 말에 제약이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표현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다. 우리는 한국이나 대한민국보다 우리나라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을 선호한다. 해서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외국인이 부를라치면,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개사해서 부르는 진풍경이 연출되곤 한다.
우리라는 단어의 선호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집’이나 ‘우리 와이프’처럼 공유경제의 궁극(?)을 보여 주는 듯한 표현도 서슴없이 사용된다. ‘우리’ 표현은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공동체 강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모든 음식점에서는 ‘이모’가 서빙을 해 주는 기현상이 발생하곤 한다. 물론 호칭은 이모지만, 가격만큼은 남처럼 받지만 말이다.
우리라는 명칭의 일반화는 집단에 대한 선호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게임을 해도 다중접속 게임을 선호하며 메신저 등이 발달한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측면이 세계 최고의 인터넷 속도와 최초의 5G 상용화가 아닌가!
또 우리 민족은 현실에서도 개인 간의 접촉을 선호한다. 머슴아들은 친할수록 툭툭 치는 문화가 있고, 여성들은 손을 잡고 화장실을 가는 모습이 쉽게 목도된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외국인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진풍경이 바로 이런 우리들의 일상이다. 화장실까지 손을 잡고 가는 상황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기사 과거 남자애들은 하나의 나무나 전봇대를 중심으로, 또래 집단이 소변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런 집단친밀성이 강한 우리나라에 국가 차원의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되고 있다. 즉 우리의 공동체 전통이 불가항력적인 시험대에 올라선 것이다. 사실 우리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공통체 문화는 1990년대에 들어와 서구화 및 경제발전으로 인해 급속한 해체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에 핵폭탄을 투여한 사건이 1997년 IMF 외환위기였다.
IMF 이후 우리 사회는 급격한 개인화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19의 거리 두기로 인해 두 번째 핵을 맞고 있다. 가뜩이나 IMF 이후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비대면 문화가 활성화되는 상황에서, 이번 거리 두기는 IMF 이전 세대들조차 급속하게 개인화에 편입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거리 두기는 코로나19가 끝나더라도 또 다른 우리 문화로 정착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히 어른들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뵈온 어른들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잘 구분하지 못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머리로는 구분하는데 내면으로는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등치시키곤 했던 것이다. 이는 그분들의 세대가 개인주의가 용납되지 않던 철저한 ‘우리’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변화에 능동적인 것은 젊음이며, 익숙함을 선호하는 것은 어른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첨단에는 뛰어나지만 경제적으로는 빈곤한 세대다. 이에 반해 기성세대는 삶은 힘들었지만 국가 성장의 결실인 자본을 가진 분들이다.
거리 두기의 정착은 이들 세대 간의 간극을 더욱 크게 벌려 놓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외적인 거리 두기와 함께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내적인 거리 좁히기 역시 함께 고려되었으면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행복한 국가 공동체의 완성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현명함이기 때문이다.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