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말이 있다. 지난 주 베일을 벗은 ‘더 킹’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2020년에 어울리지 않는 시대를 역행하는 대사부터 김은숙 작가의 전작인 ‘도깨비’ ‘태양의 후예’ ‘상속자들’의 기시감이 느껴지는 설정들까지, 매력보다는 아쉬움이 짙은 드라마로 전락해 버린 탓이다.
SBS 새 금토드라마 ‘더 킹-영원의 군주’(이하 ‘더 킹’)이 지난 17일 출발을 알렸다. 자타공인 ‘히트 메이커’ 김은숙 작가의 신작이자 앞서 ‘상속자들’과 ‘도깨비’로 각각 김 작가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이민호 김고은의 캐스팅으로 비상한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지만, 어쩐지 첫 방송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기대 이하였다.
첫 방송 이후 가장 큰 ‘진입장벽’으로 꼽힌 것은 평행세계라는 작품 속 세계관에 대한 난해함이었다. 두 동강 난 ‘만파식적’을 통해 만들어진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이라는 평행세계, 1인 2역으로 분한 중심인물들의 연기 등은 시청자들의 혼란을 증폭시켰고, 결국 이는 극 초반 시청자들의 이탈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주인공인 황제 이곤(이민호)의 개연성 떨어지는 ‘막무가내’ 직진 러브라인 역시 설렘 아닌 당혹감만을 자아냈다. 대한제국에서 평행세계인 대한민국으로 넘어온 이곤이 과거 자신을 구한 의문의 사람이 남긴 신분증 속 주인공이었던 정태을에게 애틋함을 느끼며 다짜고짜 프러포즈를 하는 전개는 도무지 큰 몰입을 자아내지 못했다. 게다가 “정태을 경위. 내가 자넬 내 황후로 맞이하겠다”라는 프러포즈 멘트라니. 황당하다 못해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김은숙 표 로맨스물에서 가장 큰 힘을 가져야 할 남자 주인공의 러브라인 서사가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 속에서 이곤의 오글거리는 대사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 특히 이민호가 애마인 맥시무스를 부르는 장면이나 시도 때도 없이 ‘참수’ ‘기미’ 등을 언급하는 장면에서는 ‘대한제국 황제’라는 설정 값을 감안하더라도 오글거림을 참기 어렵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오글거리지만 먹혔던’ 김은숙 작가 표 대사들이 2020년 드라마 시장에서는 철 지난 로맨스 소설같은 유치함으로 다가오며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나아가 그간 연기력 논란 없었던 이민호에게 ‘연기가 어색하다’는 굴욕어린 평가까지 안겼다.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시청자들의 감수성을 읽지 못한 시대착오적 문제들은 이 뿐만이 아니다. 방송 이후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정은채(구서령 역)의 속옷 언급 장면이 대표적이다. 극 중 최연소, 최초 여성 총리가 된 구서령은 새빨간 시스루 원피스 차림으로 등장하더니 첫 대사로 “와이어가 없는 브라는 가슴을 못 받쳐준다”고 말한다. 게다가 하는 일은 젊은 황제와의 스캔들로 국정 지지율을 높이는 것이란다. 나름 ‘차별화 된 여성 총리’를 그리고 싶었던 모양새지만, 최근 다양한 작품들에서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상을 그려나가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차별화를 꾀한 게 아닌가 싶다.
구서령 뿐만 아니라 황제 이곤(이민호)과 선수들이 조정 경기를 하는 장면에서 여성 관객이 “남자는 적게 입고 많이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 대사 역시 현 사회에서는 충분히 성희롱성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지적에 휩싸였다.
앞서 김은숙 작가와 호흡을 맞추며 흥행을 이끌었던 이민호와 김고은의 캐스팅 역시 ‘신의 한 수’ 보단 ‘악수’에 가까워 보인다.
이민호는 군 전역 이후 3년 만의 복귀작으로 ‘더 킹’을 선택하며 안방극장 복귀를 알렸지만, 그 동안 자신이 연기 해 왔던 인물들과 유사한 캐릭터를 선택함으로써 ‘기시감’이라는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자신의 출연작이었던 ‘상속자들’은 물론 김 작가의 전작인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 속 남자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하는 츤데레 사랑꾼 캐릭터는 식상함으로 다가왔다.
김고은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도깨비’에서 도깨비와의 사랑에 빠졌던 지은탁과 ‘더 킹’에서 평행 세계를 넘어 온 대한제국 황제와의 사랑을 예고한 정태을의 모습에서는 큰 차이점을 느끼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형사가 된 지은탁의 로맨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백마 탄 왕자님 같은 남자 주인공과 씩씩한 캔디형 여자 주인공의 ‘신데렐라 형’ 러브스토리는 김은숙 작가 표 드라마의 오랜 시그니처다. 그럼에도 매 작품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매 작품 주인공들이 그려낸 매력과, 러브스토리 외에도 시청자들을 열광시킬 수 있을만한 요소들이 추가된 덕분이었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매력도, 러브스토리 이외의 흡수 지점도 부재한 상황에서 전작의 기시감은 위기를 가중시킬 뿐이다.
이제 갓 방송 첫 주를 마쳤을 뿐인데, ‘더 킹’이 넘어야 할 산은 한 둘이 아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김은숙 매직’을 완성할 수 있을지 앞으로를 지켜봐야겠지만, 그 길이 녹록치는 않아 보인다.
홍혜민 기자 hh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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