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59>부안 계화면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게 노을밖에 없네.” 영화 ‘변산(2017)’에서 주인공 학수(김정민)가 고교시절 습작 노트에 쓴 노랫말의 한 대목이다. 노을로 배를 채울 수야 없지만, 지치고 공허한 일상에서 오는 마음의 허기를 달래는 데는 노을만한 것도 없다. 끝없는 갯벌과 바다, 풍성한 들판까지 배경으로 펼쳐진다면 금상첨화다.
◇광복 후 최대 규모 계화간척지
달리고 또 달려도 광활한 들판이다. 변산반도 국립공원이 대표 관광지로 부각돼서 그렇지 부안은 들이 넓다. 부안 읍내에서 북측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 펼쳐진다. 최고 10km에 달하는 일직선 농로가 가로세로로 교차하며 바둑판처럼 농경지를 분할하고 있다. 드넓은 들판 한가운데에 계화면 소재지가 자리 잡았고, 북측 끝 계화산 자락을 따라 길다랗게 마을이 형성돼 있다.
넓은 들판의 남쪽 귀퉁이, 조봉산에 전망대가 있다. 조봉산은 겨우 30여 계단만 오르면 되는 작은 봉우리다. 그 위에 얹은 정자가 전망대다. 광활한 풍광을 한눈에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높이다. 수면 위로 정수리만 드러냈을 조봉산도, 전망대도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셈이다. 높이로 치면 전망대 앞 기념탑이 압도적이다. ‘계화도 농업개발사업 준공 기념탑’이다. 계화도의 농경지는 광복 후 최대 규모로 시행된 간척사업의 결과물이다.
부안 앞바다의 작은 섬 계화도를 1966년과 1968년 2개 방조제로 육지와 연결해 2,741ha의 광활한 농지가 조성됐다. 여의도 면적의 열 배에 가까운 땅이다. 식량증산이 당면 과제인 시대였으니 보기만해도 배부른 풍경이다. 기념탑에 새겨진 문구를 보면 당시의 시대 상황이 또렷하게 읽힌다.
“조수가 밀려들면 파도 소리만 요란하고 조수가 물러나면 아낙네들 조개 줍던 여기가 오늘은 씨 뿌리고 김매고 벼 향기 무르익는 옥토로 바뀌어질 줄 어느 뉘가 알았으랴.” 시인 이은상이 쓴 기념사는 담담하게 상황을 묘사하다 갑자기 격정적 웅변으로 변한다.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분부를 받들어 우리 지식, 우리 기술, 강인한 의지와 끈기로 불모지 갯벌을 이와 같이 개척해 놓은 것이다. 이 어찌 민족의 자랑스런 업적이 아니겠는가.”
기념탑 머릿돌에도 지도자에 대한 찬양이 새겨졌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는 힘 모아 이룩한 대역사를 높이 치하하시면서 ‘계화도 농업종합개발사업 준공 기념탑’ 휘호를 하사하시어 이 준공 기념탑을 세우게 된 것이니….” 정자 기둥에도 ‘박 대통령 각하 말씀’이 또렷하다. 억양을 살짝 바꾸고 흠모의 감정을 이입하면 북한 방송에서 듣던 어투와 비슷해진다. 삼시 세끼 쌀밥 먹어 보는 게 소원일 정도로 굶주리던 시절이었으니 누구는 합당한 헌사로 여길 테고, 누구는 개발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를 떠올릴 문구다.
간척지에는 1965년 완공된 섬진강댐 수몰민 2,786세대가 이주했다. 그 후로 주로 어업에 종사하던 5개의 원주민 마을과 4개 이주민 마을이 현재의 계화면을 형성하고 있다. 이주 초기 염분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 주민들에게 실의와 고통을 안겼던 들판은 두 세대를 거치는 동안 ‘계화미’라는 부안 특산 쌀을 생산하는 곡창으로 변모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들판에는 초록 보리와 노란 유채가 하늘거린다. 유채 경작지만 전체 농지의 약 26%에 달해 명실상부 국내 최대 규모다. 경관뿐만 아니라 유채기름 가공까지 염두에 둔 엄연한 농사다. 유채꽃 단지를 활용해 ‘계화미’를 전국에 알리려는 효과도 노리고 있다.
◇계화도, 국내 최대 노을 전망대가 된 섬
들판 끝 계화도는 간척지가 조성되기 전부터 사람이 거주하는 섬이었다. 계화산을 빙 둘러서 마을이 형성돼 있고, 섬 북측에 포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섬 바깥쪽 계화갯벌은 한때 전국 최대 백합 생산지이자 철새도래지였다. 지금은 계화방조제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의 새만금방조제가 둘러싸고 있어 갯벌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방조제에 막힌 바다로 이따금 어선이 드나들지만 이제 내세울만한 수산물도 없고, 어촌마을 특유의 생기도 찾기 어렵다. 포구 언저리의 조개구이 식당 간판은 덤불이 덮인 채 방치돼 있다. 양지마을에 간재 전우(1842~1922)의 사당이 있고, 백강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는 팻말도 세웠지만 사라져가는 포구의 쓸쓸함만 더할 뿐이다. 전우는 구한말의 유학자로 일제에 국권을 상실한 이후 부안과 군산의 작은 섬을 떠돌다 1912년부터 계화도에 정착해 후학 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백강전투는 663년 백제부흥군이 왜의 지원군과 함께 나당연합군에 맞서 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벌인 동북아 최초의 국제전이다. 어떤 유적도 없이 계화도가 백강전투의 격전지였다는 팻말만 섰으니 의구심만 더할 뿐이다.
요즘 계화도의 자랑을 꼽으라면 단연 계화산(246m)이다. 정상인 매봉에는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다. 그러나 1995년 복원한 봉수대는 한눈에 봐도 연기를 피워 위급함을 알리는 통신시설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투박한 돌탑처럼 보인다. 고증이 소홀했는지 비용이 부족했는지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사방이 탁 트여 전망만은 최고다. 두 차례의 간척사업으로 계화도는 완전히 바다를 잃었다. 대신 새만금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전망대가 됐다. 한쪽으로는 보리와 유채꽃이 일렁이는 농경지가 펼쳐지고, 맞은편으로는 새만금방조제 너머로 고군산군도와 서해 바다가 시선 닿는 곳까지 이어진다.
생태의 보고이자 해산물 창고였던 갯벌에선 십 수년째 공사가 한창이다. 바다와 단절된 동진강 언저리에는 벌써 전망대가 우뚝 섰고, 드넓은 벌판에는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일직선 도로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부지런히 공사장을 오가는 대형 덤프 트럭에는 식량 증산이라는 소박한 꿈 대신 발전과 도약이라는 거창한 명분이 실렸다. 사업 주최인 새만금개발청 홈페이지는 신공항과 신도시, 산업단지 등 장밋빛 청사진으로 그득하다. 그게 희망이든 욕망이든, 짠 내 나는 간척지를 수십 년에 걸쳐 옥토로 바꿔 온 계화도 주민들이 넘볼 수준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계화산 정상까지는 섬의 남쪽 장금마을과 북쪽 양지마을에서 등산로가 나 있다. 장금마을에서 오르는 길이 조금 더 짧다. 약 1.2km, 보통 30분을 잡는다. 바닷가의 산이 대부분 그렇듯 해발 246m는 한 치의 에누리 없이 올라야 하는 높이다.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지만 일부 구간은 숨이 찰 정도로 가파르다.
해질 무렵에 맞춰 정상에 올랐다. 수평선 부근으로 연무가 짙어 하늘과의 경계가 흐릿하다. 고군산군도의 여러 섬도 윤곽만 어렴풋하다. 새만금방조제도 아련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어디까지가 땅이고 호수이며 바다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간간이 구름 속에서 비치는 햇살이 경계가 모호한 수면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영화 ‘변산’에선 보여 줄 게 노을 밖에 없다고 겸손해 했지만, 이 노을 하나면 충분하다. 노을에도 크기와 깊이가 있다면 계화산에서 보는 새만금 노을이 단연 으뜸이다. 거칠 것 없는 벌판과 수평선을 배경으로 해넘이를 볼 수 있는 곳은 국내에 이곳밖에 없다.
계화마을 앞 계화조류지는 사진작가들에게 일출 명소로 제법 알려진 곳이다. 조류지는 간척지와 마을 사이에 조성된 좁고 긴 물길이다. 주변으로 갈대 숲이 무성해 온갖 새들이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아침이면 농경지 제방에 일렬로 늘어선 소나무가 잔잔한 수면에 비치고, 그 사이로 발갛게 태양이 떠오른다. 하늘과 호수, 그리고 일직선 제방이 빚는 단조로움이 마음을 잡는다. 말간 여백은 무한 감성으로 채워지는 공간이다.
인근의 청호저수지 역시 색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간척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조성한 인공호수로 여의도의 1.5배 크기다. 호수 서쪽 산자락에 산책로가 조성돼 있고 바로 앞은 7~8월에 탐스러운 꽃이 피어날 연꽃 군락지다.
부안=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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