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조직의 정당성은 전쟁 승리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외부로 드러난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 군은 미래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론과 관련하여 치열하게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인다. 이것은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구성원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가치를 새롭게 정의한다. 군 내부에서의 이데올로기 투쟁은 전쟁 승리를 위한 방법론을 둘러싸고 일어난다. 이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하버드대학 로젠 교수의 견해다. 정치가 ‘가치의 권위적 배분’에 관련되므로 그의 평가는 적절하다. 로젠은 군이 사회와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관료조직보다 강한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고 했다.
실제로 군 내부에서는 어떤 역할과 임무가 더 높은 우선순위를 가져야 하며, 어느 조직에 더 많은 자원을 배당해야 하느냐를 놓고 빈번하게 갈등이 발생한다. 극단적인 사례가 포레스탈 제독의 경우다. 1947년 미국은 국방부(DoD)를 출범시킨다. 트루먼 대통령은 초대 국방장관으로 해군 출신 포레스탈을 임명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방비 수준 조정과 막 개발된 핵무기 통제권을 두고 대립하는 각 군의 입장을 조율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아야 했다.
당시 미 육군과 해군은 1세기 반에 걸쳐 각자의 독립왕국을 건설한 상황이었다. 다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나름의 이론을 정립했고, 그것은 각기 견고했다. 타협이 불가능했다. 결국 육군과 새로이 창설된 공군이 연합하여 해군에 대항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포레스탈은 해군의 이익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여 크게 좌절했다. 이로 인해 그는 정신쇠약에 시달렸으며, 장관 퇴임 후 요양 중이던 병원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처럼 군대 내부에서는 자군의 역할과 임무 확장을 위해 뛰는 엘리트들이 경쟁한다. 그러한 경쟁이 투쟁으로 성격이 변하면서 포레스탈 장관의 경우와 같은 극단적인 사건도 발생하는 것이다.
군은 기본적으로 확대지향의 조직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제 살을 깎는 군비통제를 위해 열심히 뛰는 군 엘리트는 원래 나오기 힘들다. 남북 대치 상황이 지속되면서 군에서 군비통제를 고려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어 더욱 그랬다. 그리하여 군비통제를 주창하는 군인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방어위주의 군사전략도 별 인기가 없는 실정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군인이라면 ‘공격’을 얘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정치인들도 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득표에 도움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그동안 한반도에서는 공세적인 독트린과 공세적인 무기체계의 결합이 착착 진행되었다. 남북 공히 그렇다. 전문가들은 이대로 놔두면 우발전쟁의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4ㆍ27 판문점 선언 2주년을 맞고 있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전략환경은 선제공격의 이점이 부각되는 상황으로 점점 이행하고 있다.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전쟁으로 돌진할 수 있는 환경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미중이 군비경쟁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 차리지 않으면 군사충돌의 위험은 배가된다.
이번 정부 들어서 군비통제 분야가 조명을 받았다.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군비통제를 두고 군내에서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였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핵화 교착상태가 지속되면서 그나마 있는 군비통제론자들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돌파구 형성이 어려운 실정이라 그들은 모두 무력감에 빠져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계속 군비통제를 얘기해야 한다. 그 목소리가 존중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창조적인 군비통제 아이디어를 내는 군인을 대거 진급시켜서라도 분위기 쇄신이 필요해 보인다. 식어 가는 군비통제의 엔진을 다시 돌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 봐야 할 시점이다.
부형욱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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