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뉴노멀
지식인들에게 부여된 과제 중 하나는 ‘개념 만들기’다.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근대사회의 무규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회학자 에밀 뒤르케임은 ‘아노미’란 말을 내놓았고, 현대사회의 환경 위기를 분석하기 위해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라는 개념을 주조했다. 21세기에 들어와 지구적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개념 중 하나가 ‘뉴노멀(New Normal)’이다.
◇뉴노멀이란 무엇인가
뉴노멀은 일반적으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열린 새로운 지구적 경제 질서를 지칭한다. 지식사회보다는 언론에서 자주 쓰이는 대중적 개념이다. 최고경영자(CEO) 모하메드 앨 에리언이 2008년 출간한 ‘새로운 부의 탄생’에서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 질서를 뉴노멀로 파악한 것이 중요한 계기를 이뤘다.
경제학자 이일영과 정준호는 ‘뉴노멀’에서 이 개념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2009년 6월 15일 미국 방송 ABC뉴스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와 뒤이은 불황이 미국인의 생활방식에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이 뉴노멀의 세계다”라고 보도했다. 이후 이 개념은 신문과 방송의 공론장에서 두루 사용돼 왔다.
뉴노멀을 상징하는 대표적 현상은 저성장이다. 지구적 차원에서 저성장의 원인으로는 전반적 투자 부진, 저임금 노동력에 의존한 성장의 한계, 기술혁명이 가져온 고용 없는 성장, 고령화로 인한 생산가능인구 감소 및 복지부담 증가 등이 꼽혀 왔다. 이러한 저성장이 일상화되고 구조화되는 시기가 곧 뉴노멀 시대다.
기업가 피터 힌센과 경제학자이자 미국 재무부장관인 래리 서머스는 뉴노멀의 의미를 확장시켰다. 힌센은 새로운 디지털 혁명, 다시 말해 ‘디지털 혁명의 두 번째 여정’을 뉴노멀로 규정했다. 서머스의 문제의식은 금융위기로부터 벗어났는데도 왜 경제가 회복되지 않느냐에 있었다. 그는 경제적 장기 침체가 뉴노멀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전망했다.
주목할 것은 중국의 뉴노멀이다. 시진핑 주석은 2014년 중국 경제가 개혁ㆍ개방 이후 30여년간 고도성장기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때 사용한 말이 ‘신창 타이(新常態)’, 즉 뉴노멀이다. 이 신창 타이의 4대 특징으로는 중고속 성장, 구조변화, 성장동력 전환, 불확실성 증대 등이 제시됐다.
이렇듯 뉴노멀은 이전에 비정상적인 것으로 생각되던 일들이 이제는 상식적인 현상들로 변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좁게는 저성장을 위시한 저물가, 저금리, 높은 실업률로 특징지어지는 저성장 시대를 뜻하고, 넓게는 여기에 새로운 정보기술혁명까지 더하는 것을 함의한다. 예외적인 것들이 일반적인 것들로 변화하는 국면이 바로 뉴노멀 시대인 셈이다.
◇2020년대와 이중적 뉴노멀 시대
2010년대 후반에 세계 경제는 금융위기가 낳은 경제 위기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났다. 2018년 1월 출간된 세계은행의 ‘세계경제 동향 2018’ 보고서는 세계경제가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성장 둔화가 우려되지만, 투자와 무역은 회복되고, 재정은 건전하며, 신용은 개선돼 왔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의 불확실성이다. 이일영은 ‘뉴노멀 시대의 한반도 경제’에서 그 불확실성이 거시경제와 정보기술혁명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거시경제의 경우 최근의 저성장은 과거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전에는 저성장이 주기적 현상이었지만 이제는 장기적 국면을 이룬다. 저성장 추세가 장기화되면서 금융위기가 반복하고, 이는 다시 소득 안정성을 약화시켜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정보기술혁명의 경우 또한 새로운 경제적 불확실성을 낳고 있다. 그 불확실성은 인공지능 등의 제4차 산업혁명이 가져오는 기술실업과 독점체제의 강화다. 2016년 매킨지 글로벌연구소는 향후 10년간 로봇이 지구적으로 4,000만개에서 7,500만개의 일자리를 위기에 빠뜨릴 것으로 전망했다.
이 제4차 산업혁명의 중추 세력이 대기업과 첨단기술기업이다. 대기업은 기술력ㆍ경제력ㆍ정치력을 통합해 새로운 독점 전략을 수립하며, 첨단기술기업은 표준과 플랫폼 시스템에 대한 특허권을 획득해 사법 제도로 이를 보호받으려고 한다. 과거 독점 기업이 생산을 통제했다면 신흥 독점기업은 네트워크를 통제하는 것이 새로운 경제적 풍경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2020년대 벽두인 현재 또 하나의 뉴노멀이 등장하고 있다. 경제의 불확실성이 기존의 뉴노멀이라면, ‘코로나19 팬데믹’이 가져온 지구화된 위험의 불확실성은 새로운 뉴노멀이다. 현재진행형인 코로나19 팬데믹이 지구적 대혼돈을 낳음으로써 인류는 ‘코로나 이전’을 넘어 ‘코로나 이후’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 인류는 경제의 뉴노멀과 위험의 뉴노멀이 공존하는 ‘이중적 뉴노멀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이 두 뉴노멀은 긴밀히 결합돼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실물 경제를 정지시키고, 실물의 위기가 금융시장 위기로 이어지며, 금융 위기가 실물 경제에 다시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취약한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이 구조조정이 실업의 공포를 불러오고 있다.
2020년대에 이중적 뉴노멀의 미래는 그렇다면 어떻게 전망할 수 있을까. 세 가지 측면을 주목하고 싶다.
첫째, 경제 영역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은 전망을 불허한다. 위기의 원인이 경제가 아닌 전염병에 있는 만큼 코로나19가 촉발시킬 파장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위험의 뉴노멀이 경제의 뉴노멀에 주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과 이 인과과정을 통해 불확실성이 더욱 증가할 경제에 대한 ‘위험의 경제학’의 정책대안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국가의 귀환’이 진행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하자 그 동안 세계화가 얼마나 과장됐고, 글로벌 거버넌스가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돌아보게 됐다. 국민국가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보루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했다. 금융위기 이후 고장 난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에 대해선 케인스주의를 위시한 국가의 복권이 토론돼 왔다. 그런데 예기찮은 코로나19 팬데믹이 국가의 분명한 귀환을 알리고 있다.
셋째, 사회는 ‘제3의 자리’로 이동할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비대면(Untact) 서비스와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하는 ‘비대면 사회’를 열고 있다. 이번에 경험한 비대면 사회의 장점은 코로나19 사태가 끝난 다음에도 계속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흐름의 함의하는 바는, 코로나 광풍이 그치면 우리가 돌아갈 자리가 옛날의 자리가 아닌 제3의 자리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 제3의 자리는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연결이 강화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더욱 중첩되는 공간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한국사회와 뉴노멀
우리 사회에서도 금융위기 이후 뉴노멀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다. 경제가 세계시장에 깊이 통합돼 있는 만큼 지구적 경제 및 문화 변동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뉴노멀의 핵심을 이루는 저성장과 정보기술혁명은 2010년대 후반 우리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쳐 왔다.
2017년 미래창조과학부 미래준비위원회에 내놓은 ‘10년 후 대한민국 뉴노멀 시대의 성장 전략’은 이러한 영향과 관심을 반영한다. 이들은 세 가지 전략을 제시한 바 있다. 기존 주력산업을 인공지능과 정보통신기술에 결합시켜 첨단화하고, 의료바이오산업 등 향후 경제성장의 디딤돌이 될 새로운 유망산업을 일으켜 신성장 엔진으로 삼으며, 일자리 창출의 기여도가 높은 글로벌 서비스 산업을 육성하자는 것이 그것이다.
이일영과 정준호는 뉴노멀에 대한 대응의 진보적 버전을 선보인다. 두 사람은 시장 실패와 국가 실패를 보완하는 네트워크 경제를 구축하는 데 인력과 자원을 결집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전략에 더해, 이제 이중적 뉴노멀 시대를 맞이해, 지구화된 위험사회에 대한 새로운 경제ㆍ사회적 전략 또한 강구해야 한다. 그 새로운 전략은 안전을 위한 의료 공공성 및 사회복지의 강화, 기본소득의 도입, 협력주의 문화의 정착 등을 포괄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본디 변증법적으로 진행된다. 양이 누적되면 결국 질이 전환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사회에서도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열어가고 있다. 이 낯선 시대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대안 모색을 서둘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의 굿모닝 2020s’는 2020년대 지구적 사회변동의 탐색을 통해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화요일에 찾아옵니다. 다음주에는 ‘사회적 가치’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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