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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상담사 2년... 얼굴 볼 수 없어도 마음은 잘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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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상담사 2년... 얼굴 볼 수 없어도 마음은 잘 보여요”

입력
2020.04.20 01:00
수정
2020.04.20 16:25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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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 요정 할머니’ 시각장애인 상담사 자영씨

서울대생 협동조합 봄그늘에서 ‘블라인드 마음보듬’

안마사 외 선택권 없는 시각장애인의 현실

“심리상담, 장애인이 더 잘하는 일로 자리잡길”

지난 13일 오후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 ‘어둠 속 요정 할머니’로 불리는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 자영(가명)씨가 ‘블라인드 마음보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지난 13일 오후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 ‘어둠 속 요정 할머니’로 불리는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 자영(가명)씨가 ‘블라인드 마음보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심리상담사는 얼굴 표정이나 손 움직임 같은 비언어적인 동작에서 감정을 읽어요. 우리 마음보듬사는 그걸 보지 못하는 대신 청각이 예민하거든요. 상대 목소리에 집중하면 ‘안녕하세요’ 한 마디에서도 미세한 떨림과 불안감을 감지하죠.”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 자영(가명ㆍ49)씨는 ‘어둠 속 요정 할머니’로 불린다. 지난 2년간 자영씨의 상담을 받은 청년들이 “선생님 얼굴은 모르지만 함께 있으면 무중력 상태처럼 편안하다”라며 붙여준 별명이다.

눈은 보이지 않아도 상대의 아픈 마음을 정확히 어루만지는 자영씨도 처음엔 엄청 떨었다. 지난 13일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자영씨는 첫 상담을 한 2018년 5월의 그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출근 첫날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가 ‘이제 엄마는 상담사야?’라고 묻더라고요. 집을 나설 때부터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요.”

마음보듬사는 자영씨가 시력을 잃은 지 11년 만에 가진 첫 직업이다. 평범했던 주부에게 떨어진 날벼락 같았던 희귀병 망막색소변성증 진단과 좌절감으로 집 안에만 틀어박힌 4년의 시간. 자영씨는 그 절망에서 자신을 구해준 상담사와의 진솔한 대화가 다른 이에게도 희망이 될 거라는 믿음에 마음보듬의 길을 선택했다.

서울대 학생들이 만든 협동조합 봄그늘은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의 블라인드 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진은 예시이고, 실제 상담은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서 진행된다. 봄그늘 제공
서울대 학생들이 만든 협동조합 봄그늘은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의 블라인드 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진은 예시이고, 실제 상담은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서 진행된다. 봄그늘 제공

◇‘어둠 속의 대화’ 시각장애가 강점으로

시각장애인 상담사가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은 서울대 학생들의 협동조합 봄그늘이 만들었다. 사회적 난제인 시각장애인 고용창출을 위해 학생 7명과 시각장애인 상담사 7명이 뭉쳤다. 심리상담이 ‘장애인도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닌 ‘장애인이 더 잘하는 직업’으로 자리잡는 게 이들의 목표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시각장애인 고용률은 41.9%에 그쳤다. 15세 이상 시각장애인 25만명 중 절반 이상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셈이다. 직업 선택의 폭이 극히 좁다는 건 더 큰 문제다. 유보고용(일정 직종에 특정 유형 장애인을 우선적으로 고용) 제도가 적용되는 안마사 외에는 극소수의 점역사와 특수학교 교사가 전부다. 선택지가 없어 차라리 기초수급을 택한 시각장애인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봄그늘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각장애인 상담사(마음보듬사)가 일대 일로 50분간 진행하는 상담 서비스를 선보였다. 일반 상담과 달리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뤄져 ‘블라인드 마음보듬’이란 이름을 붙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더 솔직해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게 조은기(24ㆍ불어교육과) 봄그늘 대표의 설명이다.

마음보듬을 찾는 고객 대부분은 20대 초반에서 30대 후반이다. 자영씨는 “진로와 취업에 대한 고민이 많지만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어 상처를 안고 끙끙대는 친구들이 많다”며 “상처가 많았던 상담사들이 문제 해결보다 경청하고 같은 편이 돼주려 노력한다”고 전했다.

13일 오후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 협동조합 봄그늘 구성원들이 블라인드 마음보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13일 오후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 협동조합 봄그늘 구성원들이 블라인드 마음보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마음보듬사가 시각장애인 특화직업으로 자리잡길

출범 2년이 채 안 됐지만 봄그늘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벌써 250명의 고객이 마음보듬사를 만났다. 평균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9점이고, 어떤 고객은 40회 넘게 상담을 받기도 했다. 봄그늘의 서돈향(24ㆍ언론정보학과)씨는 “심리상담은 자신이 분석되고 있다는 불편함에 신원이 노출되지 않길 바라는 고객이 많다”며 “우울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증가로 멘탈케어 시장도 커지고 있는데 이 두 가지 수요가 시각장애인의 강점과 딱 들어맞았다”고 강조했다.

매번 카페를 빌려 사방에 검은 시트지를 꼼꼼히 붙이고, 이동이 불편한 마음보듬사를 상담실까지 안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봄그늘 학생들은 지친 기색이 없다. 서예빈(20ㆍ자유전공학부)씨는 “마음보듬사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즐거워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가 않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상담사들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라며 뿌듯해한다. 한 상담사는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마음보듬사 추가 모집은 언제냐는 시각장애인들의 문의전화도 매주 수통씩 걸려온다.

13일 오후 서울시 관악구의 스터디카페 그레이프라운지에서 협동조합 '봄그늘' 구성원이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13일 오후 서울시 관악구의 스터디카페 그레이프라운지에서 협동조합 '봄그늘' 구성원이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그래도 아직 갈 길은 멀다. 학생들이 운영을 해 상담은 수업이 끝난 평일 오후 7시 이후에만 가능하다. 상담비용도 전문상담의 40% 수준이라 큰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봄그늘 학생들은 “이제 시작”이라며 개의치 않았다.

봄그늘은 올해 안에 마음보듬사를 추가 모집하고 전일제로 운영시간을 확대할 계획이다. 자영씨는 “마음보듬사가 안마사 말고도 시각장애인이라면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특화직업으로 자리잡는 날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라며 “사회는 항상 장애인을 보듬어야 할 존재로 보지만 우리도 누군가를 보듬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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