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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영국에는 공손의 규칙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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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영국에는 공손의 규칙도 있다

입력
2020.04.17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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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에게 예절은 품격이다. 품격을 떨어뜨리는 말과 행동을 하는 영국인은 보기 어렵다. 예절에는 세세한 규칙이 있는데 알면 편할 때도 있다. 저녁 초대의 선물로는 와인을, 점심이라면 무알콜 음료를 들고 가면 되는데, 꽃은 언제고 환영받는 것 같다. 식사할 때 나이프는 오른손에, 포크는 왼손에 들고, 음식을 자른 후에 포크를 다른 손으로 옮기지 않으며, 끝까지 이렇게 두 손으로 먹는다. 아들이 어릴 적에 영국에 살았는데, 놀러 온 아이들이 집에 갈 때는 반드시 “Thank you for having me”라고 인사했다.

알기 어려운 규칙도 많다. 분명하지도 않고 복잡해서 영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은 알아채기 어렵고, 모르면 결코 영국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자신들도 설명하기 어려운지, 물어볼 때마다 친구 스텔라는 ‘subtle(미묘하다)’이라고 한다. 나이, 성별, 지위에 위아래가 없이 동등하므로 갑을관계가 없다는 나라에서는 직원이 손님을 공손하게 대하듯 손님도 직원에게 공손해야 한다. 손님이든 직원이든 뭘 요구할 때는 “please”를 붙여 말하고, 그 요구가 충족됐을 때는 “thank you”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영국 여인들과 런던에 갔다. 250년 전 영국의 예술 발전을 위해 시작했다는 왕립예술원 여름 전시회(Summer Exhibition of Royal Academy of Art)를 보러. 누구나 출품할 수 있고 출품 작가가 알아서 가격을 매기므로 매우 민주적이고 영국적이라 할 수 있다. 넓은 방마다 높은 천장까지 작품이 걸려 있고, 사진을 찍고 수첩에 기록하며 진지하게 감상하는 노인관람객들이 많다. 여인들은 꼼꼼히 들여다보며 느낌을 주고받았는데, 와인 병에 걸레를 얹어놓은 작품 앞에서는 “우리도 할 수 있다”며 깔깔 웃었다.

고급 티 하우스에도 갔다. 반짝거리는 샹들리에와 검은 벽에 걸린 금빛 액자가 화려했다. 빨간 가죽 등받이의자와 자주색 벨벳의자는 럭셔리했다. 페트리샤와 스텔라와 나는 아프터눈 티(삼 단 접시에 샌드위치, 스콘, 크림(Cornish clotted cream), 미니 케이크, 마카롱이 나온다)를, 제니와 글로리아는 치즈 플래터(cheese platter, 각종 치즈, 포도, 크랙커, 호두가 나온다)를 주문했다. 홍차와 화이트와인을 마시며 한껏 즐기려던 차, 스텔라가 스콘과 함께 나온 크림이 버터라며 직원을 불렀다. 버터를 사용하지 않는 곳이므로 크림이 분명하다며 직원은 크림통까지 가져왔다. 자신이 아는 바를 말하는 직원의 당당한 태도가 영국의 평등의식을 보여준다. 주장이 좁혀지지 않은 채 대화가 길어지면 우리나라에서는 손님의 큰소리나 직원이 사과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들의 대화에서는 “please”와 “thank you” 소리가 제일 많이 들린다. “please”와 “thank you”라고 말할 때마다 상황은 조용해졌고 차분해졌다. 결국 크림이 버터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건 아무에게도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집에 오자마자 여인들은 이메일을 주고받는다. 입장권을 예매해준 친구, 버스터미널까지 운전해준 친구, 간식을 준비해준 친구에게 일일이 감사를 전한다. 작년에는 쓰고 남은 판자에 못을 박아 페인트칠을 한 ‘말도 안 되는 작품’에 ‘말도 안 되는 가격표’를 붙여놓고 함께 웃었는데, 이번에는 ‘와인병과 걸레’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빗자루와 빨래집게와 양철통’ 작품을 보여준다. 영국에서는 칠십이 다 된 여인들이 이렇게 논다. 그들이 삶을 즐기는 방식이고 예술을 감상하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전시회의 목적이 영국 예술의 발전이라고 했나?

“부탁합니다”와 “감사합니다”는 영국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규칙이자, 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다. 기본을 지키고 서로를 존중하는데 이만큼 좋은 말이 있을까? 상대에게 어떻게 말하는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나는 그날 그들의 말을 들으며 그들을 보았다. 상대를 얼마나 동등하게 대하고 배려하는지. 영국에는 공손의 규칙까지 있다.

이진숙 전 ‘클럽 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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