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도 코로나 방역처럼] <1> 고용절벽 시대, 일자리 지켜라
국내 중견 의류기업 A사는 지난달부터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이미 비정규직 20여명을 해고했고 이달 말까지는 전 직원의 30%를 내보내야 한다며 부서별로 대상자를 추리는 통에 회사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A사는 주요 고객인 미국 대형 백화점 콜스가 신종 지난달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이유로 발주 물량을 취소하면서 자금난에 빠졌다. 알려진 취소물량만 550억원어치를 넘는다. 이미 제품 제작을 마친 상태이지만 콜스 측은 어떤 손실 보상도 하지 않고 있다. 유니클로, JC페니, 갭 등 다른 고객사들도 코로나19 발병 초기부터 생산량 축소, 선적 보류 등을 요구하며 A사의 부담을 키워온 상황이다.
직원들은 회사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일방적 인력 감축엔 당혹해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상 해고는 긴박한 경영난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회사는 의무 협의 대상인 노조가 없다는 이유로 쉽게 해고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일단 임금의 70%만 지급하면 되는 휴업을 택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선 “의류산업에 대한 정부의 특별지원책이 없어 힘들다”며 거부하고 있다.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한 직원은 “회사가 무급 휴직이나 월급 삭감 등을 활용해 주문이 되살아나는 시즌인 가을까지 버틸 수는 없는지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국내 기업의 대규모 감원 움직임이 현실화하면서 ‘일자리 유지’를 코로나19 대응의 최우선 정책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기업이 어떻게든 정상 영업을 유지하고 근로자도 임금을 받아 소비 생활을 영위해야 이번 미증유 사태를 극복하고 재도약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기업이 일시적 경영난에 굴복해 감원에 나서지 않도록 과감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허술한 고용유지 지원망
19일 재계에 따르면 의류산업은 코로나19에 맞선 고용유지 정책의 난맥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역이다. 국내 의류업은 원자재의 3분의 1을 수입에, 완제품의 3분의 2를 수출에 의존하는 개방형 구조라 A사처럼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아 인력 구조조정에 나서는 곳이 속출하고 있다. 더구나 영세업체 비중이 높아 고용안전망이 상대적으로 부실하지만 정부의 특별고용지원 업종에 들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피해 현황 집계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이유 중 하나다. 담당부서인 산업통상자원부 섬유탄소나노과에 있는 직원 9명은 본연의 업무 외에 마스크 제조업체와 마스크 원자재 공급업체 상황을 매일 점검해야 하고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에 마스크 수급 상황을 보고하고 있어 일손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부서를 이끄는 국장인 소재부품장비산업정책관은 청와대 인사와 맞물려 지난달 31일부터 공석이라 컨트롤타워 기능마저 상실한 상태다.
한국무역협회,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등 무역업체 권익보호를 담당하는 공공기관들도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콜스의 일방적 주문 취소로 피해를 본 국내 업체가 A사를 포함해 10여곳, 피해액은 1,200억원을 넘었지만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않는 것이 비근한 사례다. 한국무역보험공사는 해외 거래처로부터 대금을 받지 못한 중소ㆍ중견기업에 대해 무역보험을 통해 미지급금의 80%를 임시로 지급하기로 했지만 대상국을 중국으로 한정하고 있다. 콜스 피해 사례에서 보듯이 미국 유럽 등에서도 코로나19로 인한 거래 차질이 만연하고 있는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 관계자는 “해외 거래처가 부당 행위를 해도 추후 주문을 받아야 하는 한국 기업 입장에선 손해배상 청구 등 직접 대응이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며 “현지 사무소를 둔 수출 유관기관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기계, 석유ㆍ화학, 화장품, 자동차ㆍ부품 등 다른 수출 업종도 비슷한 처지다. 충남 아산에서 자동차 부품 공장을 운영하는 A사 대표는 “완성차 업체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납품도 수금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당장 직원 급여를 걱정해야 할 판”이라며 “은행에선 기존 대출이 있고 담보마저 마땅치 않다며 대출을 꺼려 희망퇴직, 육아휴직, 급여 삭감 등 모든 대책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다 과감하게 일자리 보호해야
과감한 일자리 보호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 경제 회복 국면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잡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대리 이사를 지낸 최광해 우리금융경영연구소장은 “97년 외환위기는 우리가 실력이 없어 무너진 위기였고, 금융위기는 가까스로 넘겼지만 이번 사태는 세계가 한국 경제의 실력을 인정하게 될 기회”라며 “일자리와 공장을 지켜 내면 한국은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도 “코로나가 조만간 잠잠해지면 전세계적으로 소비 폭증이 일어날 것”이라며 “이때가 되면 얼마나 빠르게 생산 능력을 정비하느냐가 수출 성패를 가르는 만큼 현 시스템을 유지하도록 업종 특성에 맞는 치밀한 정책이 요구된다”고 주문했다.
정부가 고용보호망 자체를 보다 크고 촘촘하게 짜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현행 고용 유지 정책은 크게 기업 전반에 적용되는 고용유지지원금과 영세사업체(근로자 30인 미만) 대상의 일자리안정자금으로 나뉜다.
고용유지지원금은 일시적 경영난을 겪는 사업주에게 휴업ㆍ휴직수당(통상임금의 70%)의 일부를 지원하는 제도로,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수당 지원 비율이 최대 90%로 오르고 지원 요건도 완화됐다. 하지만 업계에선 지원금 인상이 6월까지만 유지될 뿐이고, 지원 기간(최대 180일)엔 해고뿐 아니라 채용도 금지돼 인력 운용에 제약을 받는 등 한계가 있다는 반응이다.
이병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코로나19 사태가 이미 전 세계적 경제위기로 확대된 만큼 이들 지원금의 수급 기준을 완화하고 지원액을 인상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를 당분간 더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동계에선 전반적 경제 위기에 편승해 일부 기업이 불법 해고에 나서지 않도록 적극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국내 상당수 일터에서 노동관계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정부가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IMF가 기업 구제금융의 전제조건으로 고용 유지와 임원 상여금 지급 금지 등을 제시했듯이, 우리나라 역시 취약업종에 대한 공적 지원 때 일자리 보호를 조건으로 부여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관규기자 ace@hankookilbo.com
류종은기자 rje31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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