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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선거를 뒤집을 ‘숨은 보수’는 없었다

입력
2020.04.17 18:0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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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총선은 이념ㆍ지역 대결 아닌

권위주의와 수평적 가치의 충돌

미완의 선거구제 개혁 서둘러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다음 날인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일대에서 주민센터 직원들이 인근에 붙은 선거벽보를 제거하고 있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다음 날인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일대에서 주민센터 직원들이 인근에 붙은 선거벽보를 제거하고 있다.

지난 16일 아침 일어나 21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확인한 후 놀라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당이 의석의 60% 이상을 차지한 총선은 4ㆍ19 혁명과 5ㆍ16 군사정변 직후 경쟁 정당이 붕괴한 상황에서 치러진 5, 6대 총선과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던 유신 독재 시절의 9, 10대 총선을 제외하면 처음이라고 한다. 특히 민주화 이후 선거에서 특정 정파에 한 번도 4연승을 허락하지 않던 우리나라 유권자들의 철저한 견제와 균형 심리도 이번 선거에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이나 정치인들의 막말 등 현상 분석만으로는 유례없는 이번 선거 결과를 만든 유권자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거대한 빙산 같은 표심을 전례 없이 크게 움직인 저 깊은 곳의 변화를 찾을 필요가 있다. 사회 구성원 스스로가 미처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서서히 진행된 변화는 오히려 외부인이 발견하기 쉬운 경우가 많다. 지난 8일 자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의 한국 특집 기사에서 그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는 전통적인 하향식 의사 결정 구조와 개인주의적 상향식 의견 수렴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민주화 이후 30여년간 상향식 의사 표현에 익숙해진 세대가 성장했지만, 여전히 사회는 하향식 결정이 지배하고 있다. 낡은 사고 방식과 조직 운영은 점점 더 여러 분야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양자 간 긴장이 전국적으로 폭발한 결정적 사건은 2014년 세월호 침몰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에 따라 기울어지는 배 선실에 머물던 학생들이 희생됐다. 또 구조에 실패한 정부는 오히려 정보기관을 동원해 희생자 유족을 사찰하며 입을 막으려 했다. 일방적 지시가 불만스럽더라도 조직은 물론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 믿으며, 그대로 따라왔던 수많은 한국인이 이때부터 오래된 믿음을 버리기 시작했다.

이번 선거에서 보수 정파는 물밑에서 진행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흐름을 되돌리려는 헛된 노력만 했다. “6070은 대한민국이 얼마나 열악한 조건에서 발전을 이룩했는지 잘 알고 있는데, 30대 중반부터 40대는 그런 것을 잘 모르는 거 같다. 30대 중반부터 40대까지는 논리가 아니며, 막연한 정서와 거대한 무지와 착각에 빠져 있다.”이번 총선에서 중도 하차한 미래통합당 후보의 이 주장은 보수 정파의 거대한 무지와 착각의 핵심을 드러낸다.

비례대표를 제외한 지역구 후보 정당별 득표율을 보면 미래통합당은 41.5%를 얻었다. 야당은 열세 속에서도 여론조사로 드러나지 않는 ‘숨은 보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이번에도 현실화했다. 최근 2년간 유권자 성향 분석을 보면 보수 25% 내외, 중도 40~45%, 진보 30% 내외이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미래통합당은 기대 이상의 득표를 했다. 그런데도 참패했다. 위기마다 보수 진영을 구해주던 ‘숨은 보수’의 위력이 이제 사라졌다.

반면 이번 총선을 좌우한 코로나19에 대한 정부 대응은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 민심을 붙잡았다. 물론 감염자 동선 추적과 공개 그리고 적극적 감염 검사 등은 여전히 하향식 리더십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그 과정과 관련 정보를 신속하고 투명하게 공개하는 쌍방향 소통으로 국민의 변화된 눈높이를 맞추려 노력한 것이다.

그렇다고 정부 여당이 변화를 제대로 파악했다고 보기 힘들다. 국민의 다수가 개인주의적 상향식 의사결정을 바라고 있다면, 다양한 목소리를 억누르기보다 조화하는 데 유능한 정당이 유권자의 선택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당은 정치에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군소 정당의 국회 진출 문턱을 낮추겠다던 선거제 개혁 정신을 스스로 배반하는 위성 정당을 만들어, 역시 낡은 기득권 세력임을 보여 줬다.

여당이 주도권을 쥔 21대 국회에서 달라진 표심의 지형을 정확히 반영할 수 있는 선거구제 개혁에 얼마나 적극적인가를 유권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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