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햄린(1924.1.24~ 2020.3.18)
코로나19(Covid-19) 바이러스로 숨진 이는 4월 17일 정오 기준 약 14만 7,000명이다. 임신ㆍ출산과 합병증으로 숨지는 여성은, 유엔 최근 통계로 한 해 평균 약 30만 3,000명. 하루 830명, 100초 당 한 명 꼴이다. 비극의 질량을 숫자로 저울질하는 건 무참한 일이지만, 정황의 차이를 외면하는 것도 소위 문명의 도리가 아니다. 전자의 숫자를 제어하기 위해 전 세계가 최고의 의ㆍ과학자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후자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의사조차 없는 곳에서, 세상의 관심 밖에서 지금도 숨지고 있다.
출산 건수 기준 약 5%는 의료진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분만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가디언, 2014) 태아가 너무 크거나 탯줄에 엉켰거나, 자궁에 거꾸로 자리를 잡은 경우(逆兒)가 대표적인 예다. 임부가 너무 어려서, 출산 관련 기관이 덜 성숙해서 위험을 겪기도 한다. 유엔 통계에 잡힌 희생자 대부분은 의료진(산파 포함)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저개발국 비(非) 도시지역의 어리거나 젊은 빈민 여성들이다. 지역별로는 아프리카가 가장 많은데(20만8,900명), 사하라 이남 지역(20만 1,000명)이 특히 열악하다. 방글라데시와 인도, 파키스탄 등 남아시아(6만6,000명) 도 딱한 지역이다.(WHO, 1990~2015)
난산을 견뎌 살아남더라도 산모는 대개 끔찍한 후유증을 겪는다. ‘산과 누공(産科瘻孔, Obstetric Fistula)’이 대표적인 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분만 상황에 속절없이 진통을 겪으면서 태아도 대부분 사산되지만, 그 압력 때문에 산모의 방광이나 질 요도 자궁 직장 등이 뚫리는 손상이다. 질을 통해 대ㆍ소변이 상시적으로 새어 나오는 실금(失禁)은 환자의 일상 생활을 심각하게 제약한다. 염증 등 2차 합병증도 문제지만, 당장 악취 때문에 남편과 친정 식구들로부터 쫓겨나고 마을 공동체에서도 외면당하기 일쑤다. 출산력과 노동력을 상실한 여성은 가축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 당한다. 신의 저주를 받은 여자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대부분 10대~20대 초산 여성인 그들은 외톨이로 방치된 채 탈수나 굶주림으로 죽고, 스스로도 숨을 끊고, 심지어 짐승 먹이로 초원에 내버려지기도 한다.(NYT, 2014) WHO에 따르면, 2018년 현재 여성 약 200만 명이 그런 유예된 주검의 처지에 놓여 있고, 한 해에만도 평균 5만~10만 명의 새로운 누공 환자가 생겨난다.
산과 누공은 당연히 예방할 수 있는 부상이다. 조혼 악습을 없애고, 초산 시기를 늦추고, 임신ㆍ출산 과정에 제왕절개 등 적절한 의료 대응을 하면 된다. 그래서 유럽과 북미,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선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산과 누공이란 병증 자체가 사실상 사라졌다.
◇의료 봉사 갔다 ‘산과 누공’ 처참한 고통 목격
1959년 의료 선교봉사의 일환으로 의사 남편과 함께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왕립 ‘프린세스 체하이 병원(Princess Tsehay Hospital)’에 부임한 호주 출신 산부인과 의사 캐서린 햄린(Catherine Hamlin)이 누공 환자를 처음 보고 충격을 받은 것도 그래서였다. 의대에서도, 수련의-전공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배우기는커녕 듣도보도 못한 증상이었다. “배설물에 젖은 누더기 같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외래병동의 다른 환자들과 멀찍이 떨어져 혼자 앉아 있던 모습”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무려 닷새나 걸어 병원에 온 환자였다.” 부부는 계약기간 3년 동안 약 300명의 산과 누공 환자를 수술로 치료했고, 계약이 만료된 62년 병원 빈 땅에 작은 집을 짓고 아예 정착했다. 부부는 그렇게, 93년 남편이 숨진 뒤론 햄린 혼자서, 지난 달까지 만 61년 동안 누공 환자 약 6만 명에게 건강과 새 삶을 선사했다. 에티오피아 오지 5곳에 산과 클리닉을 개설했고, 조산소 80여 곳을 신설했다. 부부가 설립한 산파학교 졸업생들이 고향 인근의 조산소들을 책임졌다. 증상이 너무 심하거나 오래 방치돼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을 위한 집단 자활 마을도 건립했다. 고국 호주와 뉴질랜드, 영국, 미국 등지의 시민들과 정부, 국제자선단체들이, 수많은 의료진이 부부의 활동을 돈으로, 몸으로 거들었다. 후원금을 모으는 일도 당연히 부부의 일이었다. 그 활동으로 그들은 ‘현대의 나병’이라 불리는 누공 환자들의 현실과 아프리카 산모 보건의 실상을 세계인에게 알렸다. ‘에티오피아의 성자(聖者)’라 불린 캐서린 햄린이 아들 하나와 ‘딸 6만 명’을 두고 3월 18일 별세했다. 항년 96세.
햄린(결혼 전 이름 Elinor Catherine Nicholson)은 1924년 1월 24일 호주 시드니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명문 기숙학교 프렌셤스쿨을 거쳐 46년 시드니 의대를 졸업했다. 전공의 수련을 받던 시드니 크라운스트리트 여성병원서 15년 연상의 산부인과 의사 레지널드 햄린(Reginald Henry James Hamlin)을 만나 50년 결혼했고, 52년 남편과 함께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 사마리탄 여성병원(Samaritan Hospital for Women)서 만 4년 근무했다. 시드니 병원으로 복귀하려던 계획이 남편과 상급자의 불화 때문에 무산된 뒤, 남편과 떨어져 애들레이드의 한 아동병원서 근무하던 햄린은 58년 의학저널 ‘랜싯’에 실린 에티오피아 정부 광고를 보게 된다. 산과 의사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12세 무렵 의사가 될 마음을 먹고 내도록 의료 선교활동을 꿈꾸던 햄린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부부는 ‘딱 3년만’ 가서 일해보자고 합의, 런던서 낳은 6세 아들 리처드를 데리고 이듬해 시드니항을 떠났다. 배가 지부티 항(96년 에리트레아 독립 전까지는 에티오피아 해상 관문)에 입항 했을 때, 부부를 마중 나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출항 소식을 미리 알린 자신들의 전보를 그들은 도착 3주 뒤 직접 받았다고 한다.(bbc)
당시 누공은 에티오피아의 불치병이었다. 병원도 드물었지만, 그들의 왕립 병원조차 환자들을 되돌려 보내는 실정이었다. 누공 환자를 처음 본 뒤부터 햄린 부부는 일과 후 공부에 몰두했다. 인터넷은커녕 전화ㆍ전보 서비스도 열악하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호주와 영국 동료들에게 청해 오래된 논문들을 구해 읽고, 비뇨기과와 외과 등 관련 분야 의사들의 조언을 구했다. 수술이 손에 익게 되면서 부부는 점차 상태가 나쁜 환자들로 치료 범위를 넓혀갔다. 그들의 고용주이자 당시 에티오피아 통치자였던 개혁적 계몽군주 하일레 셀라시에(1892~1975)를 만나 누공은 신의 저주가 아니라 가난 탓에, 의사가 없어서 생기는 병이란 걸 알게 했고, 낫게 할 수 있고 낫게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환자 대부분은 병원비는 고사하고 아디스아바바까지 오는 차비조차 마련하기 벅찬 이들이었다.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 각지의 누공 환자들이 몰려 들기 시작했다. 그 환자들이 부부의 발목을 붙들었고, 누공은 그렇게 에티오피아 여성들의 숙명에서 햄린 부부의 숙명으로 옮겨졌다. 부부는 병원 한 켠에 자신들의 집을 지으며 10개 병상의 ‘누공 전문클리닉’을 함께 지었다. 74년 에티오피아 내전(1974~91)이 발발하면서 왕립병원은 군 병원으로 전환됐고, 부부는 75년 5월 ‘아디스아바바 누공 병원(Addis Ababa Fistula Hospital)’을 설립해 독립했다.
◇치료받은 여성들, 의사로 조산사로 새 인생
저널리스트(John Little)의 도움을 받아 2001년 낸 자서전 ‘The Hospital by the River’ 서문에 햄린은 “소 세 마리와 얼마간의 토지가 재산의 전부”인 가정의 17세 산모 ‘에나타네시(Enatanesh)’의 초산 사연을 소개했다.
“진통이 시작된 에나타네시의 곁에는 ‘신의 가호로’ 10번의 임신 끝에 아이 넷을 출산한 경험이 있는 시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어머니가 할 수 있는 건 ‘쪼그려 앉아 힘을 주라’는 독려와 부축, 기도가 전부였다. 태아는 산통 엿새 만에 숨진 채 뱃속에서 나왔다. 다음날 아침, 에나타네시는 자신의 분뇨로 흠뻑 젖은 요 위에서 눈을 떴다. 아이를 잃은 슬픔은, 이제 그가 감당해야 할 고통과 절망에 비하면- ‘신이여 용서하소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내용 수정 요약) 물론 에나타네시는 햄린의 치료를 받고 집으로,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햄린은 “나는 에나타네시와 유사한 사연을, 온갖 버전으로 약 2만 번쯤 들었다”고 썼다. (hamlin.org.au)
13세에 이웃 마을 60세 남자에게 팔려가 임신한 뒤 혼자 풀 숲에 앉아 출산을 해야 했던 마하부바 무하마드(Mahabouba Muhammad)는 누공이 생긴 뒤 쫓겨났고, 주민들은 “저주 받은” 그를 “하이에나 먹이로” 내다 버렸다. 혼자 몇 날 며칠을 기다시피 해서 병원을 찾아온 무하마드는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 그는 현재 누공병원의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자신이 겪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심신의 상처를 입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돌본다.
16, 17세 초산 도중 아이를 사산하고 누공이 생긴 마미투 가셰(Mamitu Gashe, 1945, 46 ?~)도 62년 그렇게 새 삶을 찾았다. 영민하고 열정도 남달랐던 가셰는 햄린 등의 도움으로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됐고, 누공을 비롯한 산과 수술의 세계적 권위자로 2018년 BBC 선정 ‘세계 100인의 여성’에 뽑혔다. 물론 그도 햄린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가셰는 2018년 인터뷰에서 “당시 나는 읽고 쓸 줄도 몰랐다. 지금 내가 아는 모든 건 햄린 부부에게서 비롯됐다.(…) 우리는 캐서린을 ‘엄마(mum)’라고 부른다. 정말 엄마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영어를 모르는 이들은 그를 ‘에마예(Emaye, 암하라어 ‘엄마’)’라 불렀다.
74년 공산주의 군부 쿠데타로 시작된 내전은 병원의 첫 시련이었다. 부상 군인들이 몰려 들었고, 햄린 일가의 안전마저 위태로워졌다. 호주와 영국 대사관 지인들은 마지막 비행기 좌석을 제공하며 탈출을 권유했고, 대사관으로라도 피신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부부는, 숙소로 유탄이 날아든 적도 있었지만 환자들 곁을 지켰다.(who.int) 의약품도, 환자들과 함께 먹을 빵도 구하기 힘들던 그 난리를 견뎌, 부부는 이듬해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전문 병원을 설립했고, 80년의 대기근도 버텨냈다. 비영리 ‘햄린 누공재단’은 국제기구와 자선단체, 호주ㆍ영국 정부및 시민들의 후원금으로 병원ㆍ조산소 외에 2007년 4년제 산파대학을 설립했다.
◇남편 잃고 흔들렸지만 ‘남아 달라’ 한 마디에…
시미엔 산맥과 ‘아프리카의 지붕’이라 불리는 아비시니아 고원을 품은 에티오피아는 평원 위주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교통이 열악한 오지들이 산재한 국가다. 1억 명 남짓 인구의 약 85%가 의료 사각지대인 농촌에 거주한다. 햄린 재단이 설립한 산과 클리닉 5곳과 80여 개 조산소가 그 공백을 메워주고 있다. 만성 환자들을 위한 재활센터 겸 생활 공동체 ‘데스타 멘더(Desta Mender)’도 수도 외곽에 조성했다. 암하라 어로 ‘기쁨의 마을(Village of Joy)’이란 뜻이다. 근년에는 환자 및 완치 여성들이 그림과 장신구, 직물 등을 만들어 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판매, 적으나마 운영비를 보태고 있다.
에티오피아인 의료진 총 550명을 보유한 그의 병원들은 누공 수술 성공률 93%의 자타공인 세계 유일, 세계 최고의 누공 전문 병원이다. 근년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를 비롯, 유럽과 미국 의대생들도 트레이닝을 받기 위해 찾곤 한다.
딱 한 번, 1993년 남편 렉(Reg)을 잃은 뒤 햄린도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처음부터 모든 걸 함께 해온 남편 없이, 혼자 해나갈 자신이 없더라는 거였다. 장례식 직후 망연자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에게 병원 조경사로 일하던 한 남성이 다가와 그의 손에 입을 맞추며 ‘떠나지 말아 달라’고, ‘뭐든 우리가 돕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훗날 그는 그 한 마디가 자신에겐 엄청난 축복이었다고 말했다.
에티오피아 정부 지원은 햄린을 비롯한 일부 의료진에게 지급하는 급여와 병원 부지, 의료용품에 대한 면세 혜택이 사실상 전부다.(abc) 나머지 인건비 등 병원 및 학교 운영 경비는 전액 후원에 의존하고 있다. 남편이 떠난 뒤부터 햄린은 3년에 한 번 꼴로 고국 호주와 영국 미국 등지를 돌며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 및 자선재단 관계자들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나병 환자도, AIDS 환자도 그들을 돕는 기관ㆍ단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산과 누공 환자들은 아는 이도, 돕는 이도 없습니다.”
햄린은 인터뷰 때마다 가난과 교육 부재, 여성 차별의 저열한 문화ㆍ관습이 산과 누공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unfpa, 2011) 그리고 자신이 해온 일은 스스로 원해서 한 것이어서 결코 힘들지 않았다고, “나에 대한 평가는 크게 과장됐다. 엄청난 역량을 지닌 의료진과 늘 함께 했고, 세계 각지의 수많은 의사들이 우리를 도왔다. 나와 내 남편이 특별히 한 거라곤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 전부다”라고도 말했다.
코로나 사태로 연일 호명되는 에티오피아 보건부 장관 출신 WHO 사무총장 테드로스 게브레예슈스(Tedros Ghebreyesus, 1965~)는 “캐서린은 인류애의 정수(the best of humanity) 같은 존재”라고 했고, 덴마크 왕세자빈 메리 엘리자베스Mary Elizabeth, 1972~)는 “에티오피아의 천사”라고 했고, 미국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2004년 80세의 그를 방송에 초청해 “우리 시대의 성자”라고 소개했다. 윈프리는 이듬해 아예 현지를 방문해 병원과 햄린의 일상을 전했고,(hamlin.org) 당시 한 해 병원 운영비와 맞먹는 45만 달러를 기부했다. 쇼 시청자들도 300만 달러를 모금했다.
햄린은 자서전을 포함해 책 두 권을 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2017년 호주 시민들은 공모 추천을 통해, 시드니 노선에 투입된 새 페리의 이름을 ‘캐서린 햄린 호’로 정했다. 에티오피아 정부가 그를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지만, 노벨위원회는 천사에게 상을 바치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2014년 1월, 그의 만 90세 생일 파티가 병원 뜰에서 잔치처럼 열렸다. 영국 여성과 결혼해 런던서 사는 외아들 리처드도 가족과 함께 그 잔치에 왔다. 12세에 런던기숙학교에 입학하면서 부모 품을 떠나야 했던, 그래서 자주 토라지기도 했을 그는 “내 어머니는 아들 하나와 딸 3만 5,000명을 두었다”고 말해, 잔치에 온 ‘딸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가장 열렬한 박수는 햄린의 “짧지만 열정적인 당부” 뒤에 터져 나왔다. “우리는 여성들이 겪는 이 끔찍한 질병을 근절해야 합니다. 그 고통, 표현할 수도 없는 고통을(…) 여러분들이 언젠가는 없애주리라 믿고 맡깁니다.”(fulbrightmekelle.wordpress.com)
2019년 5월 에티오피아 정부는 누공병원 뜰 한 켠에 햄린 부부 동상을 세웠다. 이웃 에리트레아와의 전쟁을 협상으로 종식시킨 공로로 2019년 노벨 평화상을 탄 아비 아머드(Abiy Ahmed, 1976~) 총리는 동상 제막식에서 국가와 국민을 대표해 고마움을 전했고, 그가 숨진 뒤 “우리는 진짜 보석(true gem)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부부는 에티오피아 국립 전몰장병 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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