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국제 스포츠계에선 2020 도쿄올림픽 개최 강행 여부가 최대 화두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은 빠른데 일본 정부의 판단은 느렸다. 대회 개최에 걸린 천문학적 돈 때문이었다. 지금 비슷한 일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한창이다. 아니, 상황은 더 슬프다.
EPL은 흥행의 ‘끝판왕’이다. 전 세계 188개국, 10억3,000만 가구가 매주 EPL 경기를 시청한다. 프로스포츠 시장에서 인기는 돈으로 직결된다. 이번 시즌(2019~20) EPL의 TV 중계권 수입은 4조4,496억원에 달한다. 자국내 TV 중계권료만 2조3,125억원이며 하이라이트만 따로 떼서 연간 1,145억원에 팔았다. 세계적 컨설팅업체 딜로이트는 2019~20시즌의 20개 구단 매출 합계액(코로나19 이전)을 약 7조9,030억원으로 추산했다. 눈에도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바이러스가 이렇게 큰 시장을 멈춰 세운 것이다.
EPL은 지난달 10일(한국시간) 레스터 시티와 애스턴 빌라의 경기를 끝으로 지금까지 휴업 중이다. 구단별로 올 시즌 10~11경기씩 남았다. 곧장 탈이 났다. TV 중계권자들이 올 시즌을 7월 16일까지 끝내지 못하면 잔여 중계 수만큼 중계권료를 차감하겠다고 리그를 압박했다. 브랜드 노출 기회가 원천 차단된 스폰서 기업들도 계산기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특히 구단의 성적에 따라 시즌 종료 후 스폰서가 연간 금액을 일괄 지급하는 계약 건들은 시한폭탄으로 돌변했다. 경기일 매출(티켓 판매, 케이터링 등) 쪽에서도 구멍이 크다. 빅클럽들은 매 경기당 60억원에서 100억원 사이의 매출을 일으킨다. 이게 전부 ‘올스톱’ 상태다. 시즌티켓을 환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식당 운영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수입이 없어도 주인은 임대료, 공과금, 인건비 등을 충당해야 한다. 휴점이 길어지면 버틸 재간이 없다. 지금 EPL 구단들이 그렇다.
EPL에 따르면, 이대로 올 시즌을 종료하면 중계권 손실액이 약 1조1,563억원에 달한다. 수입 규모에 맞춰 살림을 꾸리는 구단들은 난리가 났다. 당장 선수단 급여 지급에 차질이 생겼다. EPL 선수 평균 연봉은 48억원이다. 맨체스터 시티는 매달 최소 185억원씩 선수들에게 지급해야 한다. 돈 잘 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야 버티기를 선택했지만, 다른 구단들은 형편이 다르다. 뉴캐슬, 토트넘, 리버풀 등은 선수단을 제외한 일반 직원들을 임시 해고 상태로 전환해 영국 정부의 긴급 실업급여를 신청하도록 조치했다. 고정비를 줄이려는 자구책은 역풍을 맞았다. 영국 국회 문화체육위원회의 줄리언 나이트 위원장이 “도덕적 진공상태”라며 맹비난했다. 부자 구단들이 직원 급여 책임을 정부 쪽으로 돌린다는 지적이다. 소수의 고액 연봉자(선수)가 아니라 다수의 개미(직원)가 고통 분담을 강요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비난이 쏟아졌다. 리버풀은 발표 하루 만에 자구책을 철회하고 팬들에게 사과했다. 비난 여론에 밀린 토트넘도 2주 후 “5월까지 전 직원 급여 100% 지급”이라며 백기를 들었다. 선수들도 도마 위에 오른다. 윌프리드 자하(크리스털 팰리스), 해리 맥과이어(맨체스터 유나이티드)처럼 자발적으로 선행하는 선수들도 있지만, 선수들 대부분은 ‘강 건너 불구경’ 노선이다. 흉흉해진 민심이 ‘그들만의 세상’을 거칠게 비난하면서 둘 사이가 서먹해졌다. 구단과 선수의 관계는 임금 문제를 두고 틀어졌다. 선수들은 ‘구단 당신들 돈 많잖아?’라는 식, 구단들은 ‘그게 그런 게 아니야!’라는 식이다. 코로나19 여파 앞에서 EPL 시장 전체가 사분오열하는 모양새다.
현재 영국은 코로나19 확진자가 9만 명에 육박했고 사망자 수가 1만1,000명을 넘겼다. 국가적 재난 사태 속에서도 EPL은 천문학적 매출원을 사수하기 위해 리그 재개 의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리그와 구단들을 살리려니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고, 사회적 분위기와 공감하자니 구단들 쪽에서 곡소리가 난다. 최대 자산인 선수들은 선수들대로 억울해하면서 카메라 뒤로 숨는다. 참고할 것이라곤 일본 아베 정부라는 ‘나쁜 예’밖에 없다. 사면초가, 진퇴양난, 아수라장이다.
홍재민 <포포투> 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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