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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대학 자퇴 후 집에만 있는 딸… 남편은 정신병원에 입원시키자고 해요

입력
2020.04.13 04:30
수정
2020.04.13 11:17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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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박구원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박구원 기자

대학에서 그림 공부하다 한 학기 만에 자퇴한 스물세 살 딸이 줄곧 집에만 있습니다. 게임 하러 저녁에 가끔 PC방에 갈 뿐, 따로 연락해서 만나는 친구도 없는 것 같아요. 몸무게가 100㎏ 가까이 되는데 건강관리도 하지 않습니다. 집에 있어도 TV나 휴대폰만 봐요. 저나 남편이 얘기하면 듣기만 하고 말은 안 해요. 먹는 건 아무거나 잘 먹지만 체형 때문인지 옷을 매우 까다롭게 고릅니다.

어렸을 때 딸은 활달하고 밝았어요. 자신감이 넘치고 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렸어요. 2008년 금융위기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바뀌었습니다. 이사와 전학이 잦아지면서 친구도 없고, 왕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딸은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 다니기가 쉽지 않았어요. 어쩌다 한 반 30명 중에 2명만 여학생이었어요. 학교 가는 걸 힘들어 했고, 고3 때는 정신과 치료도 받았어요. 우울증 진단에 학교 안 가고 집에 있기 시작했어요. 겨우 대학에 갔지만 그림 실력 때문에 자퇴했습니다. 딸은 연년생 동생과도 툭하면 싸웁니다.


저와 남편도 아이 문제로 싸우게 됩니다. 고집 셌지만 부모 말은 듣는 아이였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가게 때문에 아이를 잘 못 돌봐줘서일까요. 남편은 정신병원 입원 얘기도 하는데, 딸은 반대합니다. 어떻게 해야 딸이 스스로 살아나갈 수 있을까요.

강금자(가명ㆍ51ㆍ자영업)


금자씨. 당신이 제게 사연을 보냈을 때 빛이 안 보이는 동굴에 있는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딸이 왜 그러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딸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뭐 하나 분명한 게 없는 그런 마음일 거예요. 내 뱃속으로 낳은 내 자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느껴졌을 때 부모의 마음은 절벽으로 떨어지듯 깊은 좌절감이 들겠지요. ‘그때 좀 잘해줄걸’이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들겠지요. 자식 키우면서 후회하지 않은 부모는 없습니다. 당신에게 밀려드는 절망과 후회처럼이요.

딸의 생각을 알 수 없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조심스러워요. 딸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편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엄마 입장에서 딸을 이해해볼게요. 딸은 지금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홀로 떠 있는 돛단배 같은 고독한 삶을 살고 있어요. 가족과도 상호작용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다른 사람은 물론, 가족과도 상호작용을 거부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게 불편해서 그렇지 않을까요. 친한 사람이 없어도 사람들은 기본적인 대화는 합니다. 볼일 보러도 가고, 아는 사람과 연락도 하고, 안부도 묻고 기본적 사회 관계를 맺고 삽니다. 하지만 딸은 꼭 필요한 말도 안 하지요.

같은 엄마의 심정으로 딸이 너무 안타까우니 당신과 머리를 맞대고 딸을 좀 더 깊이 이해해봐야 할 것 같아요. ‘당신이 어렸을 때 아이에게 왜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라고 당신을 질책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당신 손을 잡고 딸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딸의 가장 큰 문제는 아무하고도 상호작용을 안 하는 거예요. 새로운 관계를 불편해 하는 사람도 익숙한 사람들과는 잘 지냅니다. 그러나 딸은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하고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는 걸까요. 그래서 인간에게 환멸감을 느끼고 있을까요. 시급히 치료를 받아야 하는 우울증은 아닐까요.

금자씨.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고 싶어 하지요. 행복이란 단적으로 얘기하긴 어려운 추상적인 개념이지요. 부모가 재산을 물려주거나 닦달을 해서 학벌을 갖추게 하면 과연 행복할까요. 자식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부모가 돕는다는 건, 다른 사람과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끔 도와주는 게 아닐까요. 편안한 마음을 갖고 갈등 등을 원만하게 잘 해결하는, 성격 좋은 사람으로 키우는 게 행복한 사람이 되는 길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격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성격은 타고난 것과 키워지는 것이 합해져서 형성되지만, 그런 능력은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하고 있었을 때 즐겁고 편안하고, 재미있고 좋았던 긍정적인 경험에서 생깁니다. 언제나 그럴 순 없겠지만 딸은 그런 경험이 매우 부족했을 거예요.

의학적으로는 여자 아이들은 만 10세를 사춘기가 시작되는 초기 청소년기로 봅니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대인관계가 아주 밀접해져요. 단짝 친구가 생기고 속닥속닥 가까워지고 단짝과 함께 새로운 무리의 친구들과 어울리지요. 여자 아이들은 특히 말을 주고 받으며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딸은 딱 그때부터 정반대의 경험을 했어요. 자주 전학 다니고, 따돌림 당하고, 친구들에게 괴롭힘도 당하고요. 그럴 때 아이들은 주변에 도움을 청해요. 그런데 딸은 ‘괜찮다’며 내색하지 않았어요. 그건 딸이 과묵해서, 부모의 상황을 잘 이해해서, 꿋꿋하게 스스로 해결하고자 해서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나이에 정말 딸은 괜찮았을까요. 안 그랬을 거예요. 추측건데 딸은 자신의 어려움을 밖으로 내보이는 걸 굉장히 수치스럽게 여기는 성향을 가진 것 같아요. 그래서 고집스럽고 방어적으로 보였을 거예요.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어가는 능력은 어렸을 때 부모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도 길러져요. 부모는 일상에서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는 법, 배려하는 법 등을 보여줘야 해요. 괴롭힘 당한 아이가 ‘괜찮다’ 했을 때 그냥 넘어가기보다 “나 같으면 화가 날 것 같아, 네 나이에 그런 걸 당하면 속상한 게 당연한 거란다, 어른인 나도 화가 나는데 너무 참을 필요는 없어, 사람은 힘들 때는 힘들다고 하는 게 자연스러워, 힘들다고 해도 괜찮단다”라고 공감해줘야 해요.

딸이 어떤 이유로든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한들, 부모 역시 세심하게 딸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면 한결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금자씨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고, 딸 옆에 붙어서 오롯이 신경을 쓰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거 잘 압니다.

딸은 지금도 힘들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아요. 둔한 게 아니라 예민함을 지니고 있고, 그 예민함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면 내색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괴로우면서도 표현하지 않고, 표현하는 것 자체에 자존심 상해하다 보니 아예 표현 자체를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런 예민함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계가 중요해요. 자신의 방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다른 사람이 자기에 대해 말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점점 심해지면 외부의 다양한 자극을 접했을 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해지면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외부자극 자체를 차단시킵니다. 차라리 혼자 있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금자씨, 딸은 치료가 필요합니다. 과체중으로 건강이 걱정되는 상태입니다. 딸에게 먹는다는 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 자극을 통해 안정을 찾는 의미가 있어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손톱을 물어뜯는 구강자극으로 심리적 안정을 찾는 것처럼, 음식을 입에 넣어 씹고 삼키는 감각으로 안정을 되찾고자 하는 거예요. 외부와 단절되고, 상호작용이 전혀 없는 이 상태가 딸에게 편안한 상태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딸을 억지로 병원에 데려갈 순 없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치료를 해주고 싶은 부모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저도 동의해요. 하지만 억지로 데려가는 건 오히려 딸의 예민함을 더 자극할 우려가 있어요. 딸이 자신의 안전한 경계가 무너진다고 느끼면 이전보다 더 단단하게 마음의 벽을 쌓을 거예요. 지속적인 치료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어요.

치료의 길로 가기 위해선 우선 가족끼리라도 소통을 아주 조금씩 늘려가는 게 필요해요. 그래야 딸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금자씨의 진심이 딸에게 전달됩니다.

일단 딸에게 “우리는 너를 무척 사랑하고, 네가 학교에 가고, 돈을 벌어오길 원하는 게 아니라 네가 조금 더 마음이 편안하고, 건강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는 마음을 잘 전달해야 합니다. 걱정이 앞선 나머지 “너 어쩌려고 그러니” 같은 미래의 부정적 결과를 예단해서 정신 차리라고 표현을 한다든지, “가족인데 밥도 좀 같이 먹자”는 식으로 아직 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한다든지, “넌 만날 그 모양이냐” 같은 비난을 해서는 절대 안돼요.

딸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기도 하고, 냉장고나 방문에 마음이 담긴 쪽지를 붙여 놓기도 하는 등 비언어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조금씩 딸과의 접점을 늘려가야 해요. 딸의 비위를 맞추라는 게 아니라 딸에게 당신의 걱정 어린 그 진심을 잘 전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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