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성장의 주역인 섬유수출산업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고사 위기에 처했다. 주요 고객인 미국 의류 브랜드 업체들이 코로나19 사태를 핑계로 잇따라 주문 취소에 나서면서다. 제조까지 끝낸 물량조차 일방적으로 취소하면서 지난달 국내 기업들의 손실은 수천억 원대에 달했다. 하지만 관계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에선 섬유산업에 대한 지원책은 뒷전으로 미루고 마스크 수급 안정에만 주력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8일 무역협회 등에 따르면 국내 섬유·의류 분야 수출은 2000년 188억달러(22조9,059억원)를 달성한 이후, 중국·동남아 업체에 밀리면서 지난해엔 129억6,000만달러(15조7,904억원)로 급감했다. 유명 자체 브랜드가 없는 상태에서 주문자 상표부착 생산(OEM) 방식 등에만 의존한 가운데 가져온 성과다. 국내 업체에 OEM을 맡긴 주요 브랜드는 갭, 아베크롬비, 언더아머, 유니클로, 막스앤스펜서, 월마트, JC페니, 콜스 등으로 주로 미국 업체들이다.
문제는 주요 고객인 미국 업체에서 코로나19 사태로 현지 매장을 줄지어 폐쇄하고 국내에 의뢰했던 제품 주문까지 함께 백지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지난해 2조원대 수출실적을 올린 국내 A사의 경우 지난달 미국 수출을 위해 준비했던 660억원 규모의 물량에 대해 일방적으로 거부당했다. 또 다른 업체인 B사는 미국에서 주문 받았던 550억원 상당의 물량을 창고에 쌓아둔 상태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주문을 취소한 미국 브랜드는 대형 백화점 체인을 운영하는 기업으로, 매년 1조원 이상 주문하고 있어 국내 업체들의 피해액은 막대할 전망이다. B사 관계자는 “지난달 화상회의를 열고 선적한 물량을 포함한 4, 5월 미국에 도착할 납품의류 전량을 취소한다고 통보했다”며 “피해액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서 소송도 고려하고 있지만, 이 업체의 주문 물량이 워낙 커서 선뜻 결정을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외의 미국 브랜드에서도 이달 들어 무기한 선적연기나 대금지급 거부 등 사실상 주문 취소에 들어갔다.
피해는 국내 기업들의 몫이다. 한국 업체들은 보통 6개월 전에 구매계약을 맺고 원재료를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과테말라 등 해외 생산시설에 보내 의류를 생산·공급하고 있다. 즉 배송기간을 감안하면 납품 마감일 1, 2개월 전에는 의류를 완성한 상태여서, 이 시기에 주문 취소를 하면 결국 전량 폐기해야 한다.
수출업체들은 납품 취소로 인한 유동성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자체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과 협의 없이 강제휴업, 부당해고 등이 벌어지고 있다. 인간중심 경영을 한다는 C사의 경우 노동조합이 없다는 점을 노리고 지난달 비정규직 20여명을 해고한 데 이어, 이달엔 전 직원의 30%를 해고한다며 퇴직을 압박하고 있다. 지난해 모범납세자상을 탄 D사는 인력 50% 감축을 목표로, 직원들 퇴사를 유도하고 있다. 자체 브랜드도 운영하는 상장업체인 E사는 수출사업부의 25%인 50여명에게 이달 초부터 유선으로 해고를 통보했다. 참다 못한 일부 직원들은 청와대 신문고에 ‘문재인 대통령님 COVID-19 확산에 따른 한국 의류벤더 섬유 산업을 살려주세요’라는 국민청원을 올리기까지 했다.
일부 업체들은 원자재 협력업체에게 고통분담을 요구하면서 대금지급을 거부하고 있어 연쇄충격도 벌어지는 모양새다. 이에 한국섬유산업연합회 등 업계에선 산업부에 △중견기업 대상 긴급 경영자금 지원 확대 △피해 증빙기준 완화 △무역보험, 대금 미지급 피해 대상국 확대 등을 요구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통화가 어려울 정도로 담당부서인 섬유탄소나노과에 마스크와 관련된 각종 요구가 쇄도하고 있다”며 “섬유산업이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으며 조만간 구체적인 현황 파악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박관규기자 ac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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