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37>중국 속 한민족 문화 ① 뤼순감옥과 압록강단교
뤼순감옥의 안중근 의사 전시관. 중국어, 한국어, 영어로 설명문을 붙여 놓았다.

중국 땅에는 한민족 문화의 흔적이 많다. 뤼순감옥이 있는 다롄, 압록강단교와 조선 연행사절단이 지나던 단둥이 있으며 수풍댐에서 시작해 콴덴까지 유람선을 타고 북한 땅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고구려 유적 홀본성이 있는 환런과 국내성이 있는 지안을 거쳐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 우뚝 솟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찾아간다.

인천공항에서 비행시간이 가장 짧은 지역 중 하나가 다롄이다. 1시간 조금 더 걸린다. 다롄공항에서 요동반도 최남단 뤼순까지는 1시간가량 소요된다. 항일 투사의 영혼이 잠든 뤼순감옥으로 유명하다. 한때 한국인 출입을 통제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일아감옥구지박물관(日俄監獄舊址博物館)이다. 일본과 러시아가 감옥으로 사용하던 옛터를 박물관으로 꾸몄다는 작명이다.

뤼순감옥 입구.

신분증 검사를 한다. 여권을 보여주면 된다. 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담장 주위에는 잔디가 깔렸고 꽃도 폈다. 1902년 제정러시아가 85칸 감옥으로 처음 건축했다. 서구 열강이 청나라를 할거하던 시대다. 1907년 일본제국주의가 다시 275칸으로 확장했다. 관동도독부감옥본서(關東都督府監獄本署)였다. 1926년부터 무시무시한 이름인 형무소로 바뀐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진주해 감옥을 해체한 후 중국 정부가 인수했다. 반세기에 걸쳐 제국주의에 열렬하게 항거한 투사들이 감옥에서 열사로 부활한다.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유적지로 들어가면 속살은 더 아프다.

뤼순감옥에 전시된 수의.
뤼순감옥 감방에 적힌 수인 번호.
학생들이 뤼순감옥의 안중근 의사 독방을 둘러보고 있다.

먼저 수의 진열대와 만난다. 축 늘어진 옷이 열사의 모습인 양 느껴져 오래 보기 힘들다. 옥문이 굳게 닫혔다. 문 옆에는 수인 번호로 보이는 팻말이 꽂혔다. 틈새로 보니 녹슨 밥그릇이 몇 개 놓였다. 감정이입이 시작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감옥은 크게 세 동으로 나눠져 있다. 문밖으로 나와 다른 건물로 이동한다. 좁은 통로에 사람이 북적거린다. 안중근 의사가 구금됐던 방이다. 일제는 안 의사를 국사범(國事犯)으로 간주해 독방에 구금했다. 감옥 책임자인 간수부장 숙직실 바로 옆이다. 수금조선애국지사(囚禁朝鮮愛國志士) 뇌방(牢房)이라 쓰여 있고 자세한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수금은 수감, 뇌방은 감방이다. 뜻이 같아도 한국어와 중국어 단어에 약간 차이가 난다. 영어와 일본어도 있다.

뤼순감옥의 안중근 의사 독방에 그의 간단한 일대기가 쓰여 있다. “안중근(1879~1910), 조선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 1907년 조선의병운동에 참가해 참모 중장을 역임하고 1909년 대한독립동맹 조직에 참여했다. 동년 10월 26일 그는 중국 하얼빈 기차역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중심 인물이자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체포돼 11월 3일 여순감옥으로 압송됐다. 일본의 국사범으로 분류돼 간수부장 당직실 옆 이 감방에서 단독으로 구금됐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형장에서 순국했다. 향년 32세.”
뤼순감옥에 전시된 통모. 죄수를 압송할 때 머리에 씌우는 용도다.
뤼순감옥에 전시된 고문대.

죄수를 압송할 때 얼굴을 씌우던 통모(筒帽)가 전시돼 있다. 밥그릇 종류도 일곱 개다. 죄수의 밥도 등급을 나눠 차별했다. 고문 도구가 있는 방도 있다. 1937년 6월 수감됐던 쑤이쉐민의 증언이 있다. 공산당을 방조했다는 죄명으로 감옥에 가둔 후 라오후덩(老虎凳)이라 불리는 고문 도구에 묶고 대나무로 죽도록 때렸다. 하루 건너 한번 때려 제거다(揭疙瘩)의 고통이었다고 증언한다. ‘거다’는 부스럼이나 피딱지이고 ‘제’는 그걸 떼는 고통이다. 지금도 몸에 매맞은 흉터가 남아있다는 설명이다. 3개월 동안 한달 반이나 고문을 당했다. 응어리 맺힌 쑤이쉐민이 감옥을 찾아 증언한 사진도 보인다. 가끔 식당에 가면 주문해 먹던 수제비 요리인 거다탕(疙瘩汤)을 이때부터 끊었다. 고문은 머리, 두 팔과 두 다리까지 다섯 갈래로 나무에 눕히고 진행됐다. 능지처참 자세다.

그뤼순감옥에 남아 있는 교수형 시골통. 차마 보기 힘들다.
실내로 옮긴 뤼순감옥 묘지의 국화.

감옥 건물을 나와 마당을 지나면 묘지 터가 보인다. 교형장(絞刑場) 건물 바로 옆이다. 위층에서 밧줄에 걸려 교수형이 끝나면 사각형 구멍으로 떨어져 시골통(尸骨桶)으로 들어간다. 시체를 묻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국화 향기가 진동한다. 묘지에 있던 유골을 수거해 전시장에 진열했다. 만행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이해되지만, 눈을 금방 돌리게 된다. 교수대를 거쳐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다. 감옥 내부를 샅샅이 뒤졌지만 오리무중이다. 하루 빨리 조국 땅으로 귀국하길 기대한다.

외쪽부터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선생 흉상.

특별전시관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함께 유언, 자서전, 법정투쟁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 독립과 ‘동양평화론’에 대한 설명도 있다. 1963년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의 담화가 있다.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때부터 시작됐다’는 내용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일제의 뤼순감옥 희생자다. 역사 연구를 통해 민족독립운동을 증진하고 무장 투쟁과 무정부주의를 실천하던 중 1928년 5월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순국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도 바로 옆에 나란히 있다.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하고 헤이그 밀사 파견을 주도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무장 독립투쟁을 추진했다. 만주에서 항일의용군 결성을 주도하던 1932년 체포돼 65세의 나이에 살인과 같은 고문 끝에 순국했다.

뤼순감옥 외부.

뤼순감옥을 둘러보고 나왔다. 날씨가 쾌청하다. 푸르른 조국의 하늘을 보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순국한 열사의 현장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배운다. 해방 후에도 제국주의의 횡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남과 북으로 갈라선 이데올로기 전쟁은 현대사가 낳은 질곡이 됐다. 그리고 6ㆍ25 전쟁이 발발했다. 가까운 압록강에 그 흔적이 있다.

단둥의 압록강단교 야경.
단둥 압록강변의 야경.

다롄에서 단둥까지는 300km, 4시간가량 걸린다. 압록강 강변 거리에 한글 간판이 제법 많다. 조한백화(朝韓百貨)에는 조선(북한) 상품을 판다. 조선족 동포의 어감으로 걸린 간판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조선 우표나 담배를 판다. 저녁 산보를 나온 사람이 꽤 많다. 조선 식당에 북한 국기와 중국의 홍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압록강 철교가 끊어진 단교(斷橋)까지 걸었다. 화려한 조명도 중간에 멈췄다. 여러 색깔로 조명이 계속 바뀐다. 화려한 중국 쪽 철교에 비해 북한 쪽은 막막한 어둠이다.

2007년 5월에 처음 단둥에 왔다. 그때 추억이 생각난다. 착각이 빚은 행복한 기억이다. 당시 민박 집에서 아침에 일어났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지나 빗줄기가 다소 약해졌다. 택시를 타고 강변으로 갔다. 북한 땅으로 가는 쾌속정을 타라고 손짓한다. 35위안인데 20위안만 내란다. 얼른 구명조끼를 입고 쾌속정에 올라탔다. 중국 젊은이 한 쌍이 타고 있다.

쾌속정 타고 간 북한 땅.

배는 정말 빨랐다. 붕 소리를 내더니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헤치고 질주, 딱 5분 걸렸다. 안개까지 몰아내고 북한 땅 앞에 급정거했다. 낚시하는 사람, 강변을 걷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이 선명하게 보였다. 낯설고도 낯익은 조선 사람, 북한 사람이었다. 중국 젊은이들과 나, 동승한 승무원까지 각각 사진을 한 장씩 찍자 마자 쾌속정은 급 유턴했다. 정신 없이 달려 원위치로 돌아왔다. 살짝 공포에 떨었다. 단둥에서 쾌속정은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다.

압록강의 유람선.

강변을 걷는데 나루터에 모인 40여명이 스님 염불에 맞춰 배를 타고 있었다. 방생하러 가는 길이다. 함께 탈 수 있는지 물었더니 20위안! 재빨리 들어갔다. 두 대의 배에 신도들이 나누어 탔다. 물고기를 담은 통도 실었다. 마침 음력 4월 초파일이었다. 배는 서서히 큰 원을 그리며 출발했다. 시끄러운 염불 소리로 분위기는 웅성웅성했다. 그 소리에 맞춘 듯 느리게 움직이던 배가 멈췄다. 승려가 뱃전으로 나가 통째로 물고기를 강물에 쏟아붓는다. 방생 의식은 따로 없었다.

북한 땅이라 착각했던 중국의 압록강 나루터.

일이 끝나자 배는 서서히 안개를 헤치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압록강의 안개는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짙은 안개 속에 육지 가까이 가니 낚시하는 사람, 강변을 걷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 모두 북한 사람이 분명했다. 순간 착각에 빠졌다. 이 배는 북한 땅에 종교행사를 가는 길이었던가? 돌연 혼백이 빠져나간 듯 하나 둘 배에서 내린다. 맨 뒤에서 조마조마하며 내릴까 말까 고민하는데 빨리 내리라는 고함이 들렸다. 육지로 가는 사람도 있고 나루터에서 그냥 사진 찍는 사람도 있다. 나루터에만 내려도 국가보안법 위반일까? 발이 허공을 붕붕 나는 것 같았다.

압록강의 북한 배.
압록강 유람선에서 본 북한 주민.

나루터에서 꼼짝 못하고 잠시 기다렸다. 옆에 있던 배가 출발 준비 중이었다. 일단 북한 땅을 벗어나자는 생각에 45위안을 내고 다시 탔다. 배는 크게 원을 그리며 상류로 움직였다. 단교를 향해 서서히 이동했다. 끊어진 철교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처럼 애처로워 보였다. 배는 강변을 따라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고 안개가 약간 사라지니 다시 북한 땅이 전시관처럼 나타났다. 북한 강변, 북한 국기를 꽂은 고기잡이 배, 구호가 적힌 간판, 사람 사는 집, 벌레가 울어대는 나무가 선명하게 펼쳐진다. 낯익은 듯 낯설다. 배는 상류로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배에서 본 중국 단교.
중국에서 본 북한 단교.

잠시 착각했던 그 순간에도 사실은 중국 땅을 밟고 있었다. 실수로 북한 땅에 내렸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분명 이상한 날이었다. '국가보안법적 착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던 기억이 난다. 방생하는 배를 처음 탔던 지점으로 다시 왔으니 겸연쩍다. 북한 땅이라 착각했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공포로 몽롱한 상태였고, 그 때문에 더 단단히 착각에 빠졌던 듯하다. 그래도 북한 땅에 발을 디뎠다는 착각은 행복한 추억이다. 생각해보면 중국이나 북한이나 안개가 무성했기에 별반 다르지 않아서 생긴 문제다.

6ㆍ25전쟁에 참전한 펑더화이와 중국 군대 조각.
물류 철교인 중조우의교.

지난해 12년만에 다시 압록강단교에 갔다. 압록강철교는 1911년 10월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준공했다. 너비 11m이고 길이는 944.2m인 개폐식 다리다. 단교로 가려면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 군인 동상을 거쳐야 한다. 총사령관인 펑더화이가 선두에 서고 군대가 진군하는 모습이다. 상류 쪽인 왼쪽에도 다리가 하나 더 있다. 일본 기업이 1943년 4월에 개통했다. 하교인 단교와 비교해 상교라고도 한다. 1990년부터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라 부른다. 양국의 물자가 왕래하는 다리다.

츠하오텐이 쓴 ‘압록강단교’와 ‘사위감’ 표석.
단교 앞을 지나는 유람선.

1950년 11월 미군 전투기의 맹폭이 시작됐다. 북한 쪽 다리가 파괴됐다. 가운데는 기차가 다니는 철로였다. 양쪽으로 2.6m가량 인도를 함께 건축했다. 1993년 단교를 보수해 관광지가 됐다. ‘압록강단교(鴨綠江斷橋)’라는 글씨는 당시 국방부장관인 츠하오텐의 필체를 도금한 것이다. 천천히 걸어가면 북한 땅이 점점 가깝게 보인다.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끊어진 다리를 보며 지나가고 있다. 예전의 나처럼. 단교 끝에 ‘역사의 거울을 삼는다’는 사위감(史爲鑑) 바위가 있다.

압록강단교 너머로 신축 중인 신의주 시청이 보인다.

북한 쪽 다리는 교각의 형체만 남아 앙상하다. 12년만에 다시 왔더니 약간의 변화가 있다. 신의주시 놀이시설은 변함없다. 약간 오른쪽으로 예전에 없었던 붉고 둥근 대형 건물이 보인다. 압록강을 관망하는 멋진 호텔이 아닐까 생각했다. 수소문해 보니 신축 중인 신의주 시청이다. 저 건물을 자유로이 드나드는 날이 오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생각해본다. 상상만으로 행복하다. 여기는 단둥, 중국 땅이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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