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교보문고 광화점의 독서 테이블. 한국일보 자료사진

# 희한한 광경 하나: 한 남자가 두툼한 책 다섯 권을 양팔에 안고 대형서점 안내데스크로 걸어갔다. 안고 있던 책들을 던지듯 부려 놓은 그가 직원에게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 이것들은 다 봤고, 그 리스트에 있는 책들 좀 찾아 주시오.” 마스크 아래서 잠깐 두 눈을 치켜뜨던 여성 직원이 옆에 선 아르바이트생에게 쪽지를 건네고는 이내 상냥한 미소로 응대했다. “알겠습니다, 손님. 앉아 계시던 자리로 가서 기다리시면 저희가 찾아다 드릴게요.” 남자가 책을 펼쳐 엎어서 찜해 놓은 자기 자리로 멀어지기 무섭게 데스크에 서 있던 그녀의 입에서 짧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염병!”

# 희한한 광경 둘: 손님 뜸한 서점 계산대를 지키며 하루하루 줄어드는 매출을 걱정하던 직원의 귀에 다짜고짜 욕설 섞인 반말이 날아들었다. “이봐! 삑삑거리는 그 기계 소리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책 좀 읽으려면 삐빅, 애써서 집중하면 또 삐빅삐빅. 일 분이 멀다 하고 눈치도 없이 울려대는 그 시끄러운 소리 땜에 당최 독서를 할 수가 있어야지.” 계산대에서 5m쯤 떨어진 자리에 앉은 남성의 일성이었다. 말인즉 책값을 계산할 때 사용하는 바코드 인식기 기계음이 안락해야 할 자신의 독서를 몹시, 매우 불쾌하게 방해한다는 어필이었다.

봉변에 가까운 두 번째 에피소드를 몸소 겪은 서점 직원은 나와도 아는 사이였다. 잠시 짬을 내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두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다면 선뜻 믿기지 않았을 이 해프닝을 두고 그는 새삼 당혹스러울 것도 없다고 했다. 몇 년 전부터 서점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소파와 책상을 들여놓은 이후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는 풍경이라는 거였다. 아까 큰소리를 친 남자는 출근 도장 찍듯 서점 문 열리자마자 쳐들어와 그곳에서 제일 좋은 책상을 차지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한데 그날 한 10분쯤 늦는 바람에 지정석이라 여겨온 자리를 빼앗기자 저렇게 우거지상을 한 채 신경질을 부리고 있다는 거였다.

책은 공공재의 색채가 강하다. 국공립도서관이나 학교에서 적잖은 책을 구입해 일반에게 대여하는 건 그런 맥락이다. 책방에서 쾌적한 공간을 마련해 고객 편의를 돕는 것 역시 매출을 늘리자는 전략적 차원 이전에 책이 지닌 공공성을 고려한 까닭이다. 아무리 그래도 손바닥 뒤집듯 편리하게 호의와 배려를 등가의 권리로 치환해 버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더구나 출판사와 서점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현실에서 그런 꼴들을 보자니 욕지기가 치밀었다. 나와 이야기하던 서점 직원은 사태가 이 지경일 걸 경영진이 예측했다면, 절대로 지금 같은 휴식공간을 만들지 않았을 거라며 희미하게 웃었다.

삶은 아이러니투성이다. 씁쓸했던 그 저녁,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회사 포스트에 달린 쪽지를 발견했다. “귀사에서 출간한 책 ‘1493’을 방금 다 읽었습니다. 딱딱한 학술서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흥미로운 스토리가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랐어요. 어려운 출판 환경에도 이런 책을 번역ㆍ출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 번에 찍으실 때 수정되기를 바라며, 책을 읽다가 발견한 오자 몇 개를 알려 드립니다.” 수십 수백 번을 받아도, 받을 때마다 떨리는 독자 편지였다. 으흐흐! 덕분에 우리 출판사 그럭저럭 살 만해요. 나는 잽싸게 비밀 쪽지를 날려 글쓴이의 이름과 주소와 연락처를 따냈고, 다음 날 오전 그와 전화 통화를 하는 데 성공했다. 일면식도 없는 이의 아름다운 호의에 답하기 위해 우체국에 가는 길. 전날 서점에서 보았던 진상 고객님들의 얼굴이 불쑥 떠오르며 일장 연설이라도 늘어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 이 냥반들아! 호의란 이렇게 주고받는 거라고. 맨날 죽치고 앉아 책을 읽었으면, 세상사를 터득하는 맛이라도 있어야지 말이야.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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