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개봉한 영화 ‘모리의 정원’
“요즘 알게 된 겁니다만, 개미 이 녀석은 왼쪽 두 번째 다리부터 움직이기 시작하더이다.”
백발에 덥수룩한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 자신을 찾아온 젊은 사진작가에게 건넨 말이다. 한참을 땅바닥에 바짝 머리를 대고 개미떼를 유심히 지켜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노인네 집 앞 뜰 개미의 다리 운동에 대해 젊은 사진작가는 알 도리가 없다. 그저 “모르겠다”고 할 뿐. 다만 자신을 따라 온 조수에게 “30년 동안 정원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으니 신선이 아니면 뭐겠냐”고 속삭일 뿐이다.
정부에서 훈장을 주려고 할 만큼 유명한 화가인 구마가이 모리카즈(야마자키 쓰토무)는 아침 식사를 끝내면 아내 히데코(키키 키린)와 바둑을 둔 뒤 ‘먼 길’을 떠난다. 정원으로의 여행이다. 꽃과 풀을 만나고 개미, 파리, 송사리는 물론, 과묵해 보이는 돌덩이들을 관찰하고 때론 이야기도 나눈다. 무슨 학교 운동장만큼 큰 곳도 아닌데 정갈하게 정돈되지 않은 탓일까. 관찰에 정신이 팔린 화가는 때로 길까지 잃고 헤맨다.
코로나19로 ‘집콕’이 일상화된 지금, 지난달 26일 개봉한 ‘모리의 정원’은 독특한 위로를 안겨주는 영화다.
영화 속 주인공은 일본의 실존인물인 서양화가 구마가이 모리카즈(1890~1977). 만년에 자신의 집과 정원에 칩거한 채 주변의 동식물들을 그렸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 손 안에 무한을 쥐고 / 찰나 속에서 영원을 보라’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 같은 삶을 살았다. 세심한 관찰 끝에 단순한 선과 색을 구사한 그의 그림은 지금도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기다. 영화는 물론 여기에다 허구를 덧대었다.
별다른 사건 없는, 평범한 일상을 그린 탓에 이야기 흐름은 아주 느리다. 뚜렷한 기승전결 없는 99분을 못 견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구마가이를 찾아오는 다양한 인물들, 그리고 곳곳에 배치된 엉뚱한 유머는 은은한 즐거움을 준다.
구마가이 집 앞에 아파트가 들어서며 구마가이를 지키려 하는 미술학도들이 반발한다. 이제 뭔가 갈등과 대립이 터져 나올까. 그런데 히데코와 조카는 아파트를 짓던 인부들을 초대해 만찬을 베푼다. 아파트가 들어서더라도 절망하지 않는다. 30년간 파서 만든 구덩이 아래 작은 연못을 메운다. 유일하게 해가 비추는 그곳에라도 새싹이 자라도록.
그러니까 30년간의 자발적 자가격리를 해온 늙은 화가가 어떻게 정원이라는 작은 세계를 지켜내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집콕’을 하면서도 광활한 우주를 탐험하는, 그래서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그림을 그려내는 구마가이의 삶은 코로나19 시대에 묘한 대리만족, 힐링, 위안을 안겨 준다.
‘남극의 셰프’로 알려진 오키타 슈이치 감독이 연출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천국과 지옥’ ‘붉은 수염’ ‘가케무샤’ 등에 출연한 60년 경력의 베테랑 배우 야마자키 쓰토무가 주연이다. 야마자키의 무뚝뚝한 연기도 좋지만, 키키 키린의 차분하면서 귀엽기까지 한 연기는 작품의 매력을 한층 끌어올린다.
알려진대로 키키 키린은 암 투병 중 이 영화를 촬영했고, 2018년 세상을 떠났다. 야마자키는 한 인터뷰에서 “아프다 해서 걱정했는데 한여름 무더운 촬영지에 직접 운전해서 오고 모든 것을 혼자 했다”며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고 때론 짓궂기도 하며 호기심까지 왕성했던 배우, 내가 만난 가장 개성 있는 사람”이라고 키키 키린을 추억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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