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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린 칠레에 남기로 했다…불평 대신 감사함으로

입력
2020.04.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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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131)] 여행자에게 팬데믹이란 3편 

우린 결국 칠레에 남기로 했다. 시골 구석의 숙소에서 정리할 일이 의외로 많다. 배낭에 여행한 국가의 국기를 붙이는 것도 그중 하나다.
우린 결국 칠레에 남기로 했다. 시골 구석의 숙소에서 정리할 일이 의외로 많다. 배낭에 여행한 국가의 국기를 붙이는 것도 그중 하나다.

3월 22일, 코로나19와 관련한 뉴스는 넘치고 정보는 불투명했다. 하루 사이, 아니 촌각으로 상황이 달라지는 듯했다. 나라마다 방어 태세는 판이하고 항공사의 예약 현황도 호떡처럼 뒤집힌다. 문제 없이 환승할 수 있다던 곳에서 격리 사태에 빠지기도 한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코로나 뉴스는 외신 및 현지에서 사귄 칠레인, 가족 등 여러 경로를 통해 LTE급으로 달려왔다.

이 글을 쓰기 5일 전만 해도 칼라프켄 호수에서 선탠을 즐기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믿기 어려운 풍경이 되었다.
이 글을 쓰기 5일 전만 해도 칼라프켄 호수에서 선탠을 즐기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믿기 어려운 풍경이 되었다.

칠레 여행 중인 한 프랑스인이 페이스북을 통해 셀프 영상을 남겼다. 그는 자국 대사관에 문의한 뒤 에어프랑스에 여분의 좌석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공항으로 갔다. 5시간여를 기다린 후 항공사로부터 ‘당신을 위한 티켓은 없다’라는 단출한 답을 받았다. 현재 산티아고의 에어비앤비는 예약 자체가 금지다. 호스텔 역시 공식적인 예약 사이트는 닫았고, 일부 숙소가 그나마 전화나 메시지를 통해 암거래하듯 여행자를 받고 있다.

무작정 기다려야 할 게 뻔한 상황인데, 서둘러 산티아고로 가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까. (3월 31일 기준 칠레의 코로나19 감염자 수는 2,449명이고, 그중 절반이 수도 산티아고와 인근 지역에 집중돼 있다.) 칠레에서 프랑스로 귀국한 한 친구는 파리의 공항에서 그 어떤 검사도 하지 않았다고 제보했다. 파리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 걸까. 이 경우 연결 항공편 상황에 따라 파리 체류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사이 탕탕은 ‘집월드’ 여행사로부터 답변을 받았다. 한국을 출발하기 전 1년 여정의 항공권을 구매한 여행사다. 그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마찬가지겠지. 여행사는 코로나 때문에 취소된 항공권에 대한 환불 이야기는 쏙 빼고, 산티아고에서 파리까지의 항공비를 추가로 내라 했다. 파리에서 한국으로 가는 항공편은 도와 줄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분노한 탕탕은 변호사처럼 조목조목 따졌고, 다시 그에 대한 답변을 기다려야 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알음알이로 문의한 산티아고의 숙소는 다행히 우릴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왔다.

10일간 일어날 일들이 하루 안에 터지고 있다. 빠르게 바뀐다. 칠레 정부는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 전국에 통행 금지령을 내렸다. 그 와중에 귀국 가능성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는 뉴스를 접하고야 말았으니, 그야말로 ‘올킬(All Kill)’ 상황이다. 숙소 주인 마리나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도시, 그러니까 비야리카가 속한 아라우카니아 주(州)에서 외부로 나가는 통행이 막혔다고 전했다. 우린 비행기 탑승은커녕 산티아고까지도 못 가는 신세가 됐다. 대사관과 통화한 지 불과 24시간도 안 돼 일어난 상황이다. 나중에 검색해 봤더니 외부와 통행이 막혔다는 공식 뉴스는 없었다. 그러나 산티아고발 항공권을 구하지 못했으니 결과는 달라질 게 없었다.


땅을 치고 절망하진 않았다.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둔 바 있다. 귀국하거나 하지 않거나. 지금 같은 감염병 대유행 사태를 예상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이곳에서의 장기 체류도 고려하고 있었다. 당장 귀국하지 않아도 (아직!) 우린 망하지 않는다. 잔고도 좀 있다. 항공편이 있다 해도 비싼 항공료를 감당할 길이 없어 절망에 빠진 여행자의 에피소드도 여럿 들은 바 있다. 새로운 시작, 첫 출근의 기회를 날려버린 이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우린 상황이 나은 편이다.

현재로선 여기가 안전망이다. 3월 23일 현재 우리가 체류하고 있는 주의 코로나 감염자는 37명. 숙소는 주변에 사회적 거리를 둘만한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곳이다. 마리나가 늘 강조하던 해먹에 누워 해변을 상상할 수도 있다. 행여나 시내에 갔다가 고초를 겪을지도 모를 우리를 대신해 마리나는 장까지 봐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환대 받던 타국의 여행자가 손가락질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자발적 고립이 스스로와 타인을 위해 현명한 선택일 지도 모르겠다. 귀국길에 우리가 바이러스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예외는 없다. 아무도 모른다.

복장 터질 인터넷 속도에 ‘앵그리버드’가 되곤 한다. 그러나 나의 방어기제는 ‘감사’다. 그래도 감사하다. 눈물 나게.
복장 터질 인터넷 속도에 ‘앵그리버드’가 되곤 한다. 그러나 나의 방어기제는 ‘감사’다. 그래도 감사하다. 눈물 나게.
프랑스인과 결혼한 것 중 좋은 점으로 유머를 추가해야겠다. 그대도 마음이 심란하겠지.
프랑스인과 결혼한 것 중 좋은 점으로 유머를 추가해야겠다. 그대도 마음이 심란하겠지.

마리나는 큰 스피커를 집 앞 마당에 내놓았다. 나를 위한 배려였지만 나로선 케이팝(K-pop)을 졸업한 지 오래다. 댄스를 부추기던 아이돌 그룹의 음악이 두어 곡 나오다가 그쳤다. 도무지 그녀의 취향도 아니었나 보다. 그러다가 구수한 복식호흡 소리가 들린다. 국악이다.

“얼씨구나, 덩더꿍!”

탕탕은 ‘웃음’이라는 방어기제를 적극 활용 중이다. 여러 프랑스 커뮤니티와 페이스북 검색을 통해 코로나와 관련된 유머를 용케 찾았다. 우리끼리나 웃을 이야기이지, 모르는 사람과 공유하면 욕먹기 딱 좋은 유머다. 못 말리는 프랑스인이다. 그나마 양호한 이야기를 공유해볼까. ‘이대로 개학이 연기된다면, 학부모 중 한 사람이 분명 최초의 코로나 백신 개발자가 될 거다.’ 같이 웃어 주긴 했지만 떨떠름하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속에서도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은 필요하다. 우린 당분간 칠레에 남기로 했다. 불평 대신 감사함으로, 버티고 이겨내려는 모든 세계인들이 안녕하길.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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