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한국 상업영화의 새 기수 강제규 감독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강제규 감독은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 등으로 한국 영화계에 블록버스터 시대를 열며 산업화 기반을 닦았다. 하정우 주연의 마라톤 영화 '보스톤'을 하반기 선보일 예정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학창 시절의 강제규 감독은 진지한 문학도였다. 경남 마산 부림시장에서 주물장사를 했던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며 ‘솥집 아들’이라 불렸던 그는 중학교 시절 전교 1등을 차지한 모범생이었고 명문으로 꼽히던 마산고에 진학해 서울대 상대를 목표로 하게 된다.

그리고 극심한 사춘기를 맞았다. 공부에서 손을 놓은 그는 문학서클 돝섬에 들어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나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 등을 탐독하거나 시를 습작했고, 수업을 마치면 아버지로부터 받은 니콘 필름 카메라를 들고 풍경사진을 찍곤 했다고 한다.

“이 세상은 너무 벅차고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렌즈를 통해 본 세상은 달랐다. 그곳에는 그 어떤 근심도 없었다. 일종의 도피처였다. (중략) 사진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영상물로 옮겨져 왔고 영화의 매력에 자연스럽게 매료됐다.”(일간스포츠 2015년 4월 13일자) 질풍노도의 시기였지만 훗날 실력 있는 시나리오 작가로 인정받고, 가장 성공한 영화감독의 반열로 도약하는 미래를 생각하면, 영화인으로서의 재능과 소양을 축적한 귀중한 시기였다.

영화인 강제규를 만든 작품은 데이비드 린의 대하서사극 ‘닥터 지바고’(1965)였다. 이 작품을 만났을 때의 충격을 강 감독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넘어가던 시점의 어느 날, 지금은 없어진 마산 신일극장에서 ‘닥터 지바고’를 봤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영화라는 매체가 이렇게 크게 다가오고, 이렇게 큰 울림을 주는 것인가. 도대체 영화라는 게 뭐길래 이렇게 감각을 마비시키고 쇼크를 주는가. 영화에 나오는 사랑이 너무 애달프고 간절해 혼자서 열병을 앓았습니다. 그때부터 영화관련 서적을 보면서 할 수만 있다면 영화를 해야겠다는 꿈을 키웠습니다.”(신동아 2004년 4월호)

당시 한국 영화에선 보기 드물었던 판타지물 '은행나무침대'는 컴퓨터그래픽 등을 활용해 여러 볼거리를 제공하며 흥행했다. 신씨네 제공
 ◇방송작가 활동, CF 촬영도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그는 1984년 합동영화사의 공채 시나리오 작가 모집 시험에 합격해 연수생 신분으로 충무로에 들어왔고, ‘미녀 공동묘지’(1985)를 시작으로 여러 작품의 연출부를 맡아 현장을 전전하게 된다.

당시 충무로의 현실은 암담했다. 한 편을 작업하면 150만원을 받아 다섯 명이 나눠가지는데, “보증금 20만원에 월세 5만원짜리 방인데 조감독 해서 받는 돈으로 방값을 낼 수가 없었”을 만큼 “영화계는 춥고 가난하고 배고프고 희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한국 영화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부터가 열패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화사들은 외화수입 쿼터를 얻기 위해 한 달 안에 촬영이 끝나는 저질 영화들을 졸속으로 양산해냈고, 관객들은 그런 자국의 영화를 ‘방화’라 부르며 경멸했다.

자국 영화의 현실에 절망하며 영화인들 스스로 모멸감으로 차있던 시기, 강 감독은 생활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 나섰다. 합동영화사를 떠난 후 ‘MBC 베스트 극장’의 방송작가로 극본을 집필하고 CF 촬영에 외화 수입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합동영화사 시절 연출부 선배였던 강우석 감독의 제안으로 시나리오 작가 일을 맡게 된다.

김성홍 감독의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로 크레디트에 처음 각본가로 이름을 올리게 된 강 감독은 강우석 감독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로 제27회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고, 곽지균 감독의 ‘장미의 나날’,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1994) 등 단 몇 편의 작품 만으로 충무로의 A급 시나리오 작가로 떠올랐다. 탄탄한 구성의 스토리텔링에 장기를 보인 그에게 감독으로 데뷔하라는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 감독이 데뷔를 준비할 이 무렵, 한국 영화계의 지형은 급변하고 있었다. 제6차 영화법 개정으로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직접 배급이 실시되면서, 외화수입에만 목을 매던 영화사들은 한국 영화를 통해서만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에 직면했고, 양질의 영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자국 영화에 실망한 한국 관객의 발길을 되돌려야 할 판이었다. 때마침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1993)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 영화도 예술성과 장르적 재미를 가질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기업의 자본이 영화계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강제규 감독이 '은행나무침대' 촬영장에서 배우 진희경 등과 함께 모니터를 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2년 ‘흉조의 눈’이라는 제목의 스릴러 영화 연출 제안이 들어왔지만, 이 기획은 크랭크인 직전까지 진척되었다가 무산되고 만다. 1993년 영화사 영화발전소를 세운 강 감독은 삼성물산 산하의 드림박스 투자로 기획된 비디오용 옴니버스 영화 ‘공포특급’의 한 에피소드를 맡는다. 이 소품으로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시험한 그는 본격적인 상업영화 감독 데뷔를 준비한다.

과거 충무로의 시나리오 작가들은 여관방을 잡고 그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작업에 몰두하곤 했는데, 작가 출신이었던 강 감독은 여관방 침대에서 기본적인 모티브를 얻었다. 여기에 100번 넘게 수정하는 과정에서 홍콩 작가 린탕이의 아이디어가 겹쳐지면서 천년 세월을 오가는 판타지 멜로 ‘은행나무 침대’(1996)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된다.

남북 관계를 소재로 한 '쉬리'는 전국 관객 650만명을 불러 모으며 당시 역대 최고 흥행 영화로 등극했다. 강제규필름 제공

일찍이 시도된 바 없는 요소들로 넘쳐났던 이 작품의 기획안은 위험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영화사들로부터 수없이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구미호’(1994)로 한국형 판타지를 시도했던 신씨네가 공동제작으로 나섰고 일신창투의 17억원을 포함, 당시로선 최대 제작비인 22억원을 끌어들이게 된다.

본래 크리스마스 대목을 노렸지만 특수효과 완성과 촬영 일정 지연으로 ‘은행나무 침대’는 해를 넘겨 2월 17일에 개봉하게 된다. ‘구미호’의 실패로 판타지 영화는 흥행성이 없다는 판단 하에 6개 극장에서 출발한 영화는 설 연휴를 거치며 입소문을 타 4개월 간의 장기흥행에 돌입, 서울관객 68만5,000명을 기록한다.

신현준이 연기한 악역 황장군은 폭발적인 인기로 1996년 주간지 한겨레 21에서 조사한 '사랑하고 싶은 영화 속 캐릭터' 1위에 올랐고, ‘전생 신드롬‘이 사회적 이슈가 되며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은행나무 침대’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디지털 특수효과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 영화의 성공을 계기로 대기업과 금융권의 영화계 투자가 활성화되면서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물적 기반이 마련되게 된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실미도'와 함께 한국 영화계에 제작비 100억원 시대를 연 작품으로 1,000만 관객을 모았다. 쇼박스 제공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신화 

제작을 맡은 ‘지상만가’(1997)의 대실패로 영화사가 도산하고 잠시 길거리로 내몰리는 수난을 겪었지만 강 감독은 포기하지 않았다. ‘은행나무 침대’의 시나리오 작업 때 중국 칭화대 외국인 기숙사에 3개월 머물면서 북한 유학생들을 만났던 기억을 되새긴 그는 분단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 먹고 남한 대통령이 북한공작원에 납치당해 남북이 대결하는 내용의 ‘대국전’이란 시나리오를 준비한다.

3년 간의 기획과 2년간의 수정으로 멜로 드라마의 감정선이 더해지면서 극적으로 바뀐 이 각본이 ‘쉬리’(1999)가 되었다. IMF 외환위기 직후라 제작비 마련에 난항을 겪었지만, 최고의 스타 파워를 구가하던 배우 한석규의 캐스팅이 확정되면서 삼성영상사업단이 23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한다.

‘은행나무 침대’를 상회하는 30억원의 천문학적 제작비에 촬영 회차 80회라는 전례 없는 도전을 감행한 ‘쉬리’는 서울 관객 244만명, 전국 관객 620만명이 들며 ‘타이타닉’(1997)의 한국흥행을 넘어섰고, 해외 35개국에 수출돼 일본에서만 16억엔의 대흥행을 거두며 한류 유행의 효시가 되었다.

‘쉬리’의 성공 후 강 감독은 한동안 제작과 차기작 연출 구상에 몰두했다. 염두에 둔 아이디어로는 ‘쉬리’의 속편과 할리우드 합작의 SF 영화, 징기스칸에 관한 시대극이 있었다. 그러나 TV에서 본 6ㆍ25전쟁에 관한 다큐멘터리 한 편이 모든 계획을 바뀌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전사한 최승갑 일병의 삼각자가 출토되는 장면에서 도입부의 영감을 얻은 그는 전쟁기념관에 세워진 ‘형제의 상’의 실화를 접목해 각본을 써내려 갔다. 그렇게 탄생한 제작비 148억원의 대작 ‘태극기 휘날리며(2004)는 ‘실미도’(2003)에 이어 역대 2번째 1,000만 관객을 기록하며 필모그래피의 정점을 찍었다. 강 감독은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한국 영화의 규모와 기술 수준을 갱신해나갔고, 오늘날 이어지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물꼬를 틀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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