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총 성적표 살펴보니
적극적 주주활동 선언했지만 비리 연루 경영진 선임 못 막아
대주주 지분율 높은 국내 기업서 적극적 의결권 행사 어려워
통과 무난한 안건에만 ‘반대’… 올해 주총 주주제안 한 건도 없어
자본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이 주주총회 시즌에 체면을 구기고 있다. 주주활동 강화를 천명하며 적극적 의결권 행사에 나섰지만 반대표를 던진 안건들이 모두 회사 측 뜻대로 처리됐기 때문이다. 특히 횡령이나 채용비리 등의 범죄에 연루된 인사가 경영진에 선임되는 것도 막지 못하면서 국민연금이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30일 금융투자 및 증권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12월 결산법인 46곳 주총에서 상정된 안건 80개에 반대 또는 기권표를 행사했다. 이중 53개(부분 반대 포함)는 사내·외 이사 또는 감사위원 선임과 관련된 안건이었다. 국민연금은 “기업 이해 상충” 등을 이유로 반대표를 던졌지만 주총에서 해당 안건들은 모두 가결됐다.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과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건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은 각각 채용비리와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로 형사 처벌과 금융당국 징계를 받은 상태였다. 신한금융 1대 주주(9.38%)이자 우리금융 2대 주주(7.71%)인 국민연금은 “기업가치 훼손과 주주 권익 침해 이력이 있다”며 두 사람의 사내이사 선임을 반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무난하게 주총에서 연임을 확정 지었다.
최대주주인 기업의 의사결정에서도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국민연금은 포스코(11.8%)가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한 장승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장에 대해 “연구용역 등 회사와의 이해관계로 인해 독립성 훼손이 우려된다”며 반대표를 던졌다. 그러나 주총 결과 장 사외이사 재선임 안건은 통과됐다. 횡령·배임 혐의로 징역형이 선고된 조현준 효성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의 건에 대해서도 국민연금은 ‘기업가치 훼손’이란 이유로 반대 입장을 밝혔으나 조 회장은 20일 열린 효성 주총에서 사내이사에 재선임됐다.
사실 이 같은 결과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지난해 주총에서도 국민연금은 577개사의 전체 안건(4,139건) 중 약 16%(682건)에 반대했는데 실제 부결된 비율은 약 3.5%에 불과하다. 최대주주 지분율이 높은 국내 기업의 특성 상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가 주총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찬반이 첨예하게 갈리는 안건에 대한 ‘캐스팅보트’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국민연금이 최대주주 지위를 보유한 9개 기업 지분율은 평균 10% 내외에 그친다. 국민연금공단 산하 국민연금연구원도 지난해 발표한 ‘국민연금의 의결권 영향력 및 반대 의결권 행사 현황 분석’에서 “국내 주식시장 투자규모 및 보유지분 증가에도 국민연금의 의결권 영향력은 여전히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국민연금의 주주활동 자체가 여전히 소극적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지난해 12월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의결하며 적극적 주주활동을 외쳤지만 올해 주총에서 단 한 건의 주주제안도 하지 않는 등 말과 행동이 다른 부분이 적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국민연금은 주주권 행사 여부를 결정하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정비를 지난달 말에야 마무리해 논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이지우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간사는 “국민연금은 대주주 지분이 높아 통과에 큰 무리가 없는 경우엔 반대를, 첨예한 사안에는 대세를 따르는 모습을 보여 왔다”며 “이 자체가 국민연금이 얼마나 주주활동에 소극적으로 일관하는 지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꼬집었다.
조아름 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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